[세계사이야기]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정복과정









콜럼버스 대항해의 역사적 배경


15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은 '새로운 섬, 새로운 땅, 새로운 바다'를 찾아 나서고 그것들을 실제로 발견하였다. 그러면 이 시기에 유럽인들이 새로운 항로와 미지의 나라를 찾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15세기가 흘러가는 동안 유럽에서는 봉건주의란 사회 형식의 해체가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상품과 화폐의 역동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빠르게 증가하고 점점 더 먼 거리를 뛰어넘으며 자급자족의 농업 생산과 영업 목적 생산의 분리와 보조를 함께 하는 상업이 경제 발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 속에서 특히 도시에서 형성된 상업 자본은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장하기 위해 화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동시에 지배계급 귀족의 화려하게 뽐내려는 욕구 역시 증가했으므로 보석, 진귀한 향신료, 값비싼 옷감 등에 대한 탐색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일 중요했던 것은 가장 분명하게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고 교환하기 가장 쉬운 금이었다.

 

향신료, 향료, 천 같은, 사람들이 가장 탐내는 귀중품들 가운데 많은 것이 실제로 인도에서 건너왔다. 인도는 그 당시 아시아를 의미했다. 그리고 유럽의 왕가들과 지체 높은 귀족들의 탐욕이 일반적으로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였던 그 먼 세계로 향했다. 특히 마르코 폴로가 1298~1299년에 집필한 여행기가 그가 방문한 카타이를 부의 이상향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몹시 자극했기 때문에 이 책을 후세에, 즉 콜럼버스 시대에 와서 금에 대한 욕망이 광기를 띠기 시작했을 때 시도된 발견 항해를 부추긴 결정적인 동기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수세기 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져 왔던 중국과 유럽 사이의 전통적인 무역이 15세기 중엽부터 크게 방해받았다. 오래 전부터 이슬람 세계가 이윤에 눈독을 들인 중개자로 무역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마저 터키인들에게 정복당하자 값비싼 물건들의 값이 또다시 껑충 뛰었다. 예컨대 베네치아는 동양과의 무역을 이전대로 계속할 수 있기 위해 몇 번 터키족과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에 자치구를 가지고 있었던 제노바는 단숨에 무역 지역으로서 흑해 전체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육로가 더욱 불안해져서 가급적 물품의 직교역을 가능케 하는 먼 동양으로의 길을 발견하려는 상인들의 욕구가 대두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이베리아 반도에 모아졌는데, 그곳에서는 특히 포르투갈 왕국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훨씬 전부터 아프리카를 돌아 전설적인 풍요의 나라 인도로 통하는 해로를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점점 더 넓은 아프리카의 지역들이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금이나 향신료 같은 탐나는 보물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또 처음부터 노예매매도 놓치지 않았다. ‘황금 해안’, ‘상아 해안’, ‘노예 해안등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명칭들이 이를 증언한다. 곧 적도를 돌파했다. 그리고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배를 타고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았음을 리스본에서 공표하였다. 이로써 실제적으로 인도로의 직항로가 열렸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번창하는 포르투갈에서 인생의 기회를 찾은 것은 그러므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한편, 당시 서유럽에는 동방에 그리스도 교도인 프레스터 존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와 연합하여 서쪽에서 유럽의 군대가, 동쪽에서는 프레스터 존의 군대가 공격해 들어간다면 중동의 이교도들은 망하고 말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이러한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바로 프레스터 존 왕의 이야기였다. 스스로 신앙심이 깊은 왕이라고 자처하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왕들은 이 프레스터 존과 그의 나라를 찾기 위해 항해를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두 나라는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이루게 되었다.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서부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의 왕을 만나자마자 '혹시 임금님이 프레스터 존이 아니신지요?'라고 물어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리 동방이 매력적이고 미지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하고 위험을 무릅쓸 모험정신이 왕성하다 하더라도, 새로운 항로의 발견에는 항해술의 발달을 비롯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여건이 갖추어져 있어야만 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15˜16세기에 있어서의 탐험과 해외진출에는 세 가지 분야에서의 기술적인 발전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 첫째로 지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의 확대와 그것의 실제적인 항해문제에의 적용, 둘째로 조선과 항해기술의 발달, 그리고 셋째로 화기 특히 해전에서의 이의 이용의 발달이다. (처음 두 분야의 경우 유럽인들은 고전고대와 인접한 이슬람세계로부터 필요한 지식을 획득하였으나, 이러한 지식을 실제로 현실에 응용하는 면에 있어서 르네상스기의 유럽인들은 놀라울 만큼 독창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리상의 발견을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서, 집권적인 통일국가의 형성을 들 수 있다. 새로운 항로의 탐색과 발견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과 그것이 실패하였을 경우의 희생을 감수할 능력은 역시 통일국가를 이룩한 왕권에 구할 수밖에 없었다. 번영을 자랑하던 베네치아나 항구도시들은 구태여 새로운 항로를 찾을 필요가 없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는 어느 정도 지중해무역이나 북해무역의 혜택을 받고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만 할 절박한 이유나 필요성도 없었다. 포르투갈 및 이와 경쟁적인 입장에 있는 에스파냐는 지중해무역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고, 이슬람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초래될 경제적 이득에 대한 강렬한 갈망과 필요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 같이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리상의 발견이라고도 하는 이 대항해시대에 행하여진 새로운 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의 전 세계로의 팽창과 확대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의 유럽의 발전은 물론이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과 모든 사람을 포함한 세계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콜럼버스의 4차례 항해 요약

1. 1차 항해(1492~93)

왕실과 협약을 맺은 후 콜럼버스는 522일부터 팔로스 항에 머물면서 항해를 준비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산타마리아호, 니냐호, 핀타호 세 척의 배를 팔로스 시에서 제공했다. 항해 준비 과정에 참여한 마르틴 알론소 핀손과 그의 동생 빈센테 야녜스, 니냐호의 소유주였던 후안 니뇨로는 항해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덕분에 항해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는 데 불과 70여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14928390여 명의 선원을 태운 세 척의 배가 팔로스 항을 떠났다.

 

선단은 812일 카나리아 제도에 들렀다가 96일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012일 산 살바도르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그 후 쿠바, 에스파뇰라 등 주변 섬들을 항해했고, 그 와중에 산타마리아호가 좌초되었다. 콜럼버스는 39명의 선원들을 에스파뇰라 섬에 남겨 둔 채 149314일 귀국길에 올라 315일 팔로스 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잠시 동안 라 라비다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한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데려온 여섯 명의 인디오와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두 국왕을 만났다.


2. 2차 항해(1493~96)

1차 항해의 성공에 힘입어 2차 항해 준비 작업은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2차 항해는 1493925일에 카디스 항에서 출항했는데, 이 선단은 17척의 배에 1,200명이 넘는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이 중에는 콜럼버스의 막내 동생인 디에고도 있었다. 1122일 선단은 에스파뇰라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1차 항해 때 남겨 두었던 39명의 선원을 찾았으나 남아 있는 것은 폐허가 된 요새뿐이었다. 여자들을 빼앗아가고 약탈을 일삼는 선원들을 원주민이 몰살시킨 것이다. 콜럼버스는 그 옆에 새로운 도시 이사벨라 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1,200여 명의 이주민들을 만족시킬만한 황금은 얻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져온 식량이 바닥나고 아픈 사람들이 생겨나자 사람들의 불만은 계속 커져 갔다. 그는 결국 12척의 배를 에스파냐로 돌려보내면서 필요한 물자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그러고 나서 콜럼버스는 1차 항해 때 발견한 쿠바 섬으로 5개월에 걸친 탐험을 떠났다. 그러나 탐험은 콜럼버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고, 이사벨라 시에 혼란만 가중시켰다. 다음해 10, 물자를 실은 4척의 배가 도착했는데 이 선단의 지휘자는 콜럼버스를 감찰하라는 임무도 부여받은 상태였다. 입장이 곤란해진 콜럼버스는 동생 바르톨로메(그는 보충 물자를 싣고 온 선단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에게 뒷일을 맡기고 14963월 귀국길에 올랐다. 611일에 카디스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두 국왕을 만나 적극적인 후원을 약속 받은 후 3차 항해를 준비했다.


3. 3차 항해(1498~1500)

3차 항해는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콜럼버스는 2차 항해에서 돌아온 지 2년이 지난 후인 1498530일에야 3차 항해를 떠날 수 있었다. 그 후 에스파뇰라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또다시 수많은 악재와 싸워야 했다. 식량 부족과 매독의 급속한 확산, 그리고 프란시스코 롤단의 반란이 그것이었다. 결국 콜럼버스는 두 국왕에게 재판관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즈음 두 국왕은 콜럼버스에게서 총독의 권한을 박탈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1499년 초, 두 국왕은 프란시스코 보바디야를 최고재판동관으로 임명하여 에스파뇰라로 보냈다. 15008월 산토 도밍고에 도착한 보바디야는 콜럼버스를 해임했다. 또한 그와 그의 두 형제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가 10월 말경 카디스로 돌려보냈다. 콜럼버스와 형제들은 12월이 되어서야 그라나다에 머물고 있는 두 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콜럼버스의 경제적 특권과 제독의 칭호를 회복시켜 주었으나 끝내 총독의 칭호는 되돌려 주지 않았다.

 

4. 4차 항해(1502~04)

15023월 두 국왕은 에스파뇰라에 기항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콜럼버스가 제출한 4차 항해 계획을 인가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항해에 함께한 사람은 140여 명이었다. 모두 4척의 배에 오른 이들은 150259일 카디스 항을 떠났다. 에스파뇰라 근처를 항해할 무렵, 폭풍을 예견한 콜럼버스는 항구에 정박하도록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때문에 그는 2척의 배를 잃었다. 15034, 남은 배 2척을 이끌고 귀항 길에 올랐으나 자메이카 근처에 이르러 배가 좌초되었다. 그는 구조를 요청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카누 2척으로 항해를 감행했다. 다행히 이 카누들은 9월에 100마일 이상 떨어진 에스파뇰라 섬에 도착했으나 구조대는 즉시 출발하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이듬해 8월에야 도착한 구조선을 타고 에스파뇰라 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같은 해 912일 그곳을 떠나 한 달 후 에스파냐에 도착했다.

 

그는 곧 두 국왕을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왕실에서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벨 여왕이 위독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콜럼버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여왕은 150411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콜럼버스는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려고 페르난도 왕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50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여행하여 드디어 세고비아에서 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총독의 칭호는 다시 얻을 수 없었다.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콜럼버스는 1506520,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콜럼버스는 처음에 바야돌리드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나중에 그의 유골이 세비야로 옮겨졌고 대략 1537년경에 그 곳에서 산토 도밍고로 옮겨졌다. 프랑스인들이 1795년 에스파뇰라를 점령하고 난 뒤에 그의 유골은 쿠바의 아바나로 옮겨졌다가 결국 1899년에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세계 대양의 제독은 화려한 국장 의식을 거쳐 세비야의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콜럼버스 대항해가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


콜럼버스의 항해는 인도로 가는 서방항로의 탐험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껏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대서양 횡단 항해를 감행함으로써 바다에 대한 당대인들의 공포와 미신을 타파하였다. 그런 점에서 콜럼버스의 탐험은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영국에 살고 있던 베네치아 출신의 존 카보트는 1496년 헨리 7세의 후원을 얻어 지금의 캐나다 동해안에 도달하였고,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여러 번 신대륙으로 건너가 중남미 쪽을 탐험한 끝에, 이 곳이 종전의 유럽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신세계일 것이라는 의견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이 신대륙은 최초의 발견자인 콜럼버스와는 관계없이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독일의 지리학자 발트제뮐러는 1507년 간행된 세계지도 속에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기다란 육지를 하나 그려 넣고 이를 아메리카라고 기록했다.

  

이후 계속된 지리상의 발견, ,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이나, 마젤란의 세계일주 등의 결과는 매우 컸다. 지리상의 발견은 장기적으로 본다면 유럽과 세계의 다른 지역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컸다. 그렇기 때문에 애덤 스미스는 이를 가리켜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하였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의 물질생활은 풍요해지고 유럽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종래 지중해무역으로 유럽인이 익히 알고 있던 동방물산이 대량으로 값싸게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산물이 소개되었다. 대표적인 상품이었던 후추의 경우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상선대는 1,300통을 운반하였고, 가격은 수시로 변동하였으나 지중해경유보다 절반가량 쌌다. 새로운 상품으로서는 캘리코와 같은 면직물이 소개되고, 17세기 초에는 차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다같이 대중의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었다.

 

새로운 상품이나 산물은 역시 아프리카와 신대륙에서 많이 도래하였다. 아프리카에서는 금과 상아가 중요시되었으나 점차로 흑상아라고도 불리어진 흑인노예가 가장 값진 상품이 되었다. 이 흑인노예는 초기에는 신대륙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그리고 후에는 북미에서 그 수요가 커졌으며 에스파냐왕실이 발급하는 흑인노예공급권은 막대한 이권이었다. 신대륙에서는 사탕, 옥수수, 감자, 코코아, 담배 등이 들어오게 되어 유럽인의 식생활과 일상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특히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의 유입은 유럽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세기 초를 기준으로 약 1세기 동안에 물가가 2배 내지 3배로 앙등하는 이른바 가격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 가격혁명은 고정된 지대수입으로 생활하는 지주와 임금노동자에게 타격을 주는 한편, 상인과 생산업자 등, 신흥자본가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은의 유입이나 새로운 산물의 도래, 그리고 보다 더 대중적인 새로운 상품의 등장 등에 못지않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 경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유럽의 상인이나 제조업자를 위한 광대한 새로운 시장의 출현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그것의 끊임없는 확대는 유럽의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전례 없는 자극과 기회를 제공하였고, 유럽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새로운 부와 자본이 축적되고 새로운 근대적인 기업형태인 주식회사가 나타나고 금융업은 보다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고, 시민계급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었다. 일부 역사가는 16세기 이후의 이러한 상업상의 큰 변혁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유럽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리켜 상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이 새로 열린 세계시장의 점거를 목표로 치열한 경쟁에 나서게 되었으며, 식민지획득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 경쟁에서 탈락한 국가나 이에 참여하지 못한 도시는 경제적 번영에서 낙오하고 이에 승리한 국가와 도시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지리상의 발견 후 얼마 안가서 이탈리아의 도시와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부독일의 도시, 그리고 북부독일의 한자도시들이 쇠퇴하고, 경제와 번영의 중심은 대서양 연안으로, 즉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에스파냐의 세비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경제적 우월과 번영도 얼마 안가서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 이로 말미암아 종전까지 비교적 서로 고립하여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발전의 길을 걸어오던 국가와 지역이 이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밀접한 역사적 연관성을 갖게 되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확대되어 우리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참된 의미의 세계사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지역을 포함하는 세계사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 유럽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19세기까지의 세계사의 흐름은 유럽의 일방적인 팽창과 침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대륙에서는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럽문화가 고스란히 이식되었으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홍수처럼 밀려오는 유럽의 상인과 선교사, 그리고 그들이 갖고 오는 유럽문화에 격심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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