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 주요 사건










1451. 8. 26(~10. 31?) 이탈리아 제노바~1506. 5. 21 스페인 바야돌리드.

 

초기 신대륙 발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4번에 걸친 그의 항해(1492~93, 1493~96, 1498~1500, 1502~04)는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탐험·개발·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콜럼버스는 제노바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스페인인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스페인계 유대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현재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부터 선원이 된 것은 확실하다. 1474~75년 에게 해의 키오스 섬에 유향을 사러가는 항해에 참가했고, 14765월 상선대에 승선하여 플랑드르로 향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산비센테 갑 앞의 바다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전쟁에 말려들어 그가 탄 배에 불이 붙게 되었다. 그는 불이 배의 갑판 위에까지 올라오는 상황에서 배를 탈출하여 라고스 해변까지 수영을 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 다음해인 1477년 초반 스페인의 구조선에 다시 승선하여 영국까지 여행했고 그후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갔다. 1478년에는 사탕을 구입하기 위해 마데이라 섬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 때문에 대서양의 서쪽에 대해 커다란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후 미지의 바다에 대한 정보를 수입하면서 라틴어와 스페인어를 배웠고 여러 지리학자의 세계지리서를 섭렵했다. 그결과 서쪽을 돌아 지판구('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 : 현재 일본의 영어 이름인 'Japan'이 이 말에서 유래)와 카타이(고대 중국을 가리키는 유럽어)에 도착하는 계획을 세웠고 피렌체의 학자 토스카넬리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1480년경에는 마데이라 제도의 포르트산드 섬의 초대 총독인 바르도로메우 페레스트레로의 딸인 펠리페와 결혼했다. 1482~83년에는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을 항해하는 여행에 나서 먼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방문지인 엘미나 교역 성채에서 흑인 노예들이 실제 매매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1483년말에는 동쪽 나라로 가는 항해 계획안을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 항해가 착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므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항해에 대한 교섭은 잘 진척 되지 않았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아들인 디에고를 데리고 이웃 나라인 카스티야에 갔다.

 

14861월 콜럼버스는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을 만나 항해계획을 제출했다.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 심사가 타라베라 신부가 주관하는 위원회에 위탁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인 그라나다 공략에 정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으므로 콜럼버스의 계획에 대한 최종판단은 그후 몇 년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포르투갈 왕과 재교섭을 시도하기도 했고 친동생인 바르돌로메를 이탈리아 왕에게 파견하여 의사 여부를 타진시키기도 했으며 콜럼버스 자신이 프랑스에 한번 가볼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49212일 그라나다가 함락되어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되었고 스페인의 여러 성직자와 궁정 인사들이 협력을 해주어 마침내 14924월 항해를 허용한다는 산타페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 따라 콜럼버스는 세습권으로서 제독의 지위를 획득하는 한편 종신직으로서 부왕의 지위에 버금가는 총독의 지위를 약속받았다. 또한 새로이 발견된 지역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이익의 10를 취득하고 앞으로의 교역활동에 대해 최고 1/8의 자본참가권을 승인받았다. 항해의 준비는 핀손 3형제의 협력을 얻어 진행되었는데 149283, 산타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3척에 1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마침내 파로스 항구로부터 그토록 꿈꾸어오던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에 정박한 후 96, 고메라 섬을 떠나 북위 28˚선상에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침편차와 사르갓소 해의 불안을 극복했다. 1012일에는 구아나하니라고 불리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지금의 와틀링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자') 섬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곧 원주민인 인디오들로부터 황금과 향료가 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쿠바 섬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하여 난파했기 때문에 급히 나비다 거류구를 설치하여 약 40여 명의 인원을 잔류시킨 뒤 귀환길에 올라 1493315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완전한 성공이라고 판단된 첫번째 항해 덕분에 2번째 항해(1493. 9. 25 출발) 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경쟁적으로 승선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금광채굴에 징발되었던 원주민의 반란도 만성화되었다.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 대신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노예로 본국에 송환했으나(1495)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3번째 항해(1498. 5. 30 출발)에 나서 향료가 나는 섬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또한 섬에서는 콜럼버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프란시스코 데 로르단 일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5008월 콜럼버스는 그의 통치능력을 심사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사찰관 보바딜리야에 의해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인 4번째 항해(1502. 5. 9 출발)를 출발하여 파나마 지협 일대를 배회했지만 태평양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1504. 11. 7). 


이 항해로 인해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고 1506521일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스페인 세비야에 묻혔으며, 1542년 히스파니올라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당시의 기록에는 그가 죽은 날짜가 1506년의 예수승천 대축일로 되어 있어 사망일이 521일임에 틀림없으나 후에 잘못되어 520일로 알려지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자') 섬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곧 원주민인 인디오들로부터 황금과 향료가 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쿠바 섬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하여 난파했기 때문에 급히 나비다 거류구를 설치하여 약 40여 명의 인원을 잔류시킨 뒤 귀환길에 올라 1493315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완전한 성공이라고 판단된 첫번째 항해 덕분에 2번째 항해(1493. 9. 25 출발) 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경쟁적으로 승선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금광채굴에 징발되었던 원주민의 반란도 만성화되었다.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 대신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노예로 본국에 송환했으나(1495)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3번째 항해(1498. 5. 30 출발)에 나서 향료가 나는 섬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섬에서는 콜럼버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프란시스코 데 로르단 일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5008월 콜럼버스는 그의 통치능력을 심사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사찰관 보바딜리야에 의해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인 4번째 항해(1502. 5. 9 출발)를 출발하여 파나마 지협 일대를 배회했지만 태평양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1504. 11. 7). 이 항해로 인해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고 1506521일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스페인 세비야에 묻혔으며, 1542년 히스파니올라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당시의 기록에는 그가 죽은 날짜가 1506년의 예수승천 대축일로 되어 있어 사망일이 521일임에 틀림없으나 후에 잘못되어 520일로 알려지기도 했다.

 

 

1492.4.17 에스파냐왕실로 부터 신대륙 탐험에 대한 후원을 얻다

1492년은 콜럼버스와 에스파냐에게 행운의 해였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과 같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벌했다. 149212일의 일이었다. 에스파냐를 건설할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그 해 417일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사벨 여왕의 콜럼버스에 대한 후원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쳤지만 결국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서로 좋아한다는 풍문도 나돌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콜럼버스는 이 후원을 얻기 위해 그 동안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를 수년간 돌아다녔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출항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콜럼버스,

신대륙 총독이 되게 해줄 거라는 이사벨 여왕의 약속 받고항해 시작

콜럼버스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금과 향료의 나라 동양이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탐험을 시작한 후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149283일 금요일 8. 살테스의 강어귀에서 모래톱을 가로질러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풍향이 자주 바뀌는 강한 바람을 타고 해질 무렵까지 48마일, 16리그를 항해한 후, 카나리 제도 쪽으로 항로를 잡고서 남서쪽과 남미서쪽으로 항해했다.”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서 신대륙을 발견했고, 탐험을 꼼꼼히 기록한 첫 번째 <항해일지>를 후원자인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왕에게 바쳤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하는 그 신대륙은 사실은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신세계혹은 신대륙이라는 표현은 그의 뒤를 이어 탐험한 서구 사람들이 사용했던 표현이었고, 또한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에 속한 서반구는 몇 천 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도 아니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이미 5백 년 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넘어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캐나다 해변까지 가 본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이룬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아메리카(그가 죽는 날까지 인도와 같은 동양이라고 믿었던)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찾아 대서양을 가로 질렀고, 콜럼버스 다음 세대 유럽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만의 신세계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오백 년 전에 왔다 간 바이킹들은 이미 이러한 정보를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탐험과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식민지와 이주의 땅을 얻게 했고, 아메리카 대륙이 오늘날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게 한 신호탄이었다. 이 발견은 올림픽의 금메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 업적으로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로 남아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딴 도시와 더불어 각국의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위인으로 남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4518월과 10월 사이에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15세기 제노바는 조선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기에, 이곳에서 자란 콜럼버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면서 소년의 꿈을 키웠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거래를 눈으로 보면서 무역 항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대 이탈리아 상인들과 동방 상인들의 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콜럼버스가 동양을 찾아 떠난 이유는 기존의 무역 항로에서 벗어나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들여올 새로운 무역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

신대륙 향해 전에 지도 제작자로 이름 얻고, 에스파냐어 배우고, 선박 조종도 익혀

꿈을 실현시켜 줄 결정적인 계기는 인생의 큰 위기가 지나고 나서 오기 마련이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선박인 카라벨의 조종법을 익혔고 북대서양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부유한 포르투갈의 관리이자 선장의 딸인 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를 만났다. 그녀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의 한 교회에서 그녀를 만나 1478년에 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인해 콜럼버스는 위험한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처가의 인맥으로 부유한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에는 검은 바다로 불린 대서양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이 유품으로 남긴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당대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지금의 중국인 카다이, 인도, 그리고 일본인 지팡구였다. 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비단과 향료와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이 넘쳐나는 곳이며, 황금과 보물이 넘쳐나는 곳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들의 육식 식탁에 반드시 필요한 향료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과 거래가 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이동 경로가 멀고 험한 탓에 동양의 물품들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쏜살같이 바다를 가로질러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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