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십자군전쟁(Crusade) 1부









십자군 전쟁의 개요


서기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회교도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위하여 유럽 그리스도 교회가 주도한 수차레의 원정 전쟁 (1095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전쟁은 1456년까지 약361년 동안 계속) 십자군은 역사적으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벌거벗은 세계사 E133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보면 십자군 원정은 성전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전쟁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


1071년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하자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 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당함. 1081알렉시우스 콤네우스가 황제가 되어서 1086년 안티오크 베데스다등의 도시가 이슬람에 빼앗기자 서방에 원군을 요청 하여 교황이 민중과 그리스도교회를 선동하여 전쟁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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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경과


이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와 문명의 충돌로써 서양의 중세사에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전쟁이며 이 전쟁의 배경에는 교황과 유럽 영주들의 잇속과 이해타산이 엉켜 원래 목적인 성지탈환은 뒷전이고 전리품 노획과 약탈이 우선된 전쟁이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이슬람 교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했고, 포로의 학대 행위로 인해 이슬람을 뭉치게 했으며, 결국 성지회복은 실패했고, 십자군은 타락하여 중세 상인들의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독단적인 의도가 강해 이루어진 전쟁이며 이를 통해 교황의 권위 신분사회의 후퇴 중세사회 영주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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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원인


3세기 이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순례 여행이 안전하고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양쪽의 상황이 모두 안정되어 있어야 했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하킴은 11세기 초에 선임자들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자 및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성지 순례 여행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1050년 무렵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면서 순례 여행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따라서 유럽은 성지를 이슬람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였고 당시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되었다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권의 공격에 시달렸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잃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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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탄압한다는 과장된 주장을 하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교황 우르바노 2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선동에 설득되었다. 곧 전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약 200여 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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