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주요 음악사

모차르트가 탁월한 음감을 지니고 1756년에 태어났을 때, 세계는 이성적으로는 계몽의 시대였으며 산업적으로는 초기자본주의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연대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 각 분야에 대해 엄밀한 의미부여를 일제히 가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가치 부여도 17,8세기에 이르러 형성되었다


상승하는 시민계급의 자녀들은 자기만의 침실을 갖는 것은 물론 예술이나 가사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도 점점 늘어났다. 아울러 이 중산 계급의 가족구조 또한 어린이를 정점으로 새롭게 재편되기 시작하였는데, 토지재산을 매개로 하는 봉건적인 가족구조로는 상공업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없었으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구조 안에서 적응할 수 있는 근대적 가족구조는 당연히 핵가족이 합리적이다.

 

이런 가족구조의 존립 원리는 사랑이 된다. 복종과 규율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새로운 윤리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과정은 적은 수의 자녀를 가진 애정적인 가족을 탄생시켰는데, 모짜르트와 관련된 사진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대로, 온 가족이 따뜻한 불빛 아래 둘러앉아 자녀들의 연주를 듣는 가정음악회는 이같은 정황의 사실적 표현이었다


이에 걸맞는 문화적 산물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그림 형제와 안데르센의 동화를 비롯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문학, 각종 어린이 용품, 그리고 어린이의 뛰어난 재주를 사방에 알리고 그 또래의 아이들을 어떤 신동의 탁월한 재주에 빗대어 음악 교육으로 단련시키게 한 음악교육의 대중화 현상이 그것이다. 이는 어린이의 탄생시기에 등장한 문화적 산물이자 어린이라는 생애주기를 채우려는 신흥 중산층의 문화적 실천이다.


이같은 문화적 실천은 18세기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이 대세의 상징적 인물로 항상 모짜르트가 지목된다. ‘음악 신동 모짜르트신화는 이같은 배경 아래서 더욱 입지를 굳건히 해왔으며 우리가 배운 조잡했던, 그리고 일본 교과서를 거의 원용하다시피 한 음악 교과서에서도 모짜르트는, 다만 신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것은 모짜르트와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그를 더 이상 신동으로 부르지 말자.

 

오히려 그가 청년기 때 활동한 프리메이슨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18세기의 준종교적인 결사체 프리메이슨은 원래 중세의 석공 길드에서 유래되었다. 17세기에 이미 형성된 중세 장인길드의 의식에 고대의 종교의식과 기사도 의식의 상징이 보태졌다. 모짜르트 시대 때 완성된 그들의 비밀의식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전통으로 행해지고 있다


지금도 프리메이슨 회원들은 비밀암호와 신입회원의 눈가리기, 중세 석공길드에서 유래된 상징들을 포함한 모짜르트 시대의 의식들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프리메이슨의 최초 대지부는 1717년 영국에서 결성되었으며 정치적 성격은 별로 없었다. ‘쉽게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들끼리 참된 우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그러나 1725년 프랑스로 전파되면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시킨 이상과 프리메이슨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체와 모짜르트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의 이력을 잠깐 살펴보자. 모짜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프리메이슨과 많은 관련이 있었다. 11살 때 그는 모라비아의 저명한 프리메이슨 회원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았으며 어릴 때 작곡한 첫 오페라 바스티앵과 바스티엔의 첫 공연도 유명한 최면술사이자 프리메이슨 회원인 안톤 메즈머의 정원에서 열었다. 17살 되던 해 모짜르트는 빈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프리메이슨와 일루미나티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토비아스 게블러의 희곡에 바탕을 둔 음악을 만들기도 하였다.

 

모짜르트가 프리메이슨의 이념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은 1781년부터이다. 빈의 사교계에 진출한 모짜르트는 화가, 작가, 음악가 등 상당수 문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프리메이슨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1785년에는 2급 회원으로 승급되었다. 이 무렵에 요제프 하이든도 인도주의적인 원칙을 신봉하는 이 단체의 회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가입하였으며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도 같은 해 5월에 가입하였다.

 

프리메이슨에서는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음악이 회원들을 단결시켜주고 그들의 평화우호적인 이념을 전파하는 데 요긴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프리메이슨을 위한 모짜르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칸타타 프리메이슨의 기쁨이다.

 

그러다가 1785년부터 죽던 해인 1791년까지 모짜르트는 드러내놓고 프리메이슨을 위한 음악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더욱 옥죄어오는 당국의 탄압도 문제였지만 질병과 빈곤, 주변의 질시와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모짜르트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는 특유의 낙천성과 음악에 대한 창조적 열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간간히 프리메이슨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곡이 오페라 마술피리이다. 마술피리는 대사나 무대장치, 음악 면에서 프리메이슨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프리메이슨의 비밀의식에서 따온 대사, 대본의 표지에 그려진 프리메이슨 상징 도판,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여성에 대한 평등주의적인 이념 등이 그 예들이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해 11월에는 함부르크 일대를 새로 개척하러 나선 프리메이슨 회원들의 우의를 드높이기 위해 프리메이슨 칸타타를 작곡하였는데 이곡은 그의 실제적인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짜르트는 이 칸타타를 두고 내가 과거에 좀더 나은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잊어먹는다면 아마도 이 작품이 내 생애의 최대 걸작이라고 만족해하였다.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은, 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넓은 의미의 실용음악에 속하였다. 그것은 궁정이나 교회 또는 시의회나 귀족의 의뢰을 받아 작곡되었으며 따라서 궁정의 연희를 흥겹게 한다든지 경건한 예배의식을 도모하는데 쓴다든지, 아니면 귀족의 연례행사나 그의 음악관을 넓혀주는 등의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당대의 이름난 작곡가는 모두 궁정음악가이거나 교회에 전속된 음악가였다.

 

일반 시민들은 예배나 시의 행사 같은 데서가 아니면 음악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18세기 중엽이 되자 시민들은 이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궁정에서는 이같은 흐름에 조응하고자 시립연주협회 같은 것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귀족이나 유독히 문화적 투자에 인색치 않았던 시의 음악 협회(collegia muisca)에 머물렀던 것이 하이든과 모짜르트가 정력적으로 활동하게 될 무렵에는 공개적인 연주회로 발전되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 연주회가 열렸으며 라이프찌히에서 1763년에 열린 연주회는 1781년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연주회가 바로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이다. 1762년 이후 런던에서는 연주회를 위한 협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으며 빈(1771)과 베를린(1790) 등지에서도 속속 이같은 협회가 만들어졌다.

 

이제 음악가들은 궁정의 만찬회장에 사용될 실용) 음악과 더불어 시민계급의 독자적인 음악생활을 보장하게 된 좀더 큰 회당을 겨냥하여 음악을 만들게 되었다. 궁정연회장에서 본격 연주회장으로 이동, 이것은 음악사의 발전을 도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모짜르트를 비롯한 18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가들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연주회장의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 들릴 수 있도록 악기와 연주자를 더 첨가하고 표현의 범위도 훨씬 확장시켜야 했다. 또한 귀족의 생일 잔치 때처럼 여러 행사 가운데 하나로 음악이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음악만을 연주하는 것이 목적인 행사가 되었으므로 이전보다 더 긴 곡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는 가뜩이나 이러저러한 표현의 장애를 겪고 있던 음악가들에게는 행운이었다.

 

물리적인 공간의 확장뿐만 아니라 새로운 청중의 숫자와 심미안도 당대의 음악에 새로운 변수였다. 공개연주회에 모인 청중은 궁정에서 음악을 듣던 귀족들과 몇가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귀족들은 자신들의 우아한 삶을 장식하는 훌륭한 인테리어로 저녁식사 도중의 연주를 즐겨 들었지만, 연주회장에 몰려든 청중들은 음악 그 자체를 듣기 위해 일부러 돈을 지불하고 시간을 쪼갠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음악에 대한 탐미욕은 귀족들의 그것과는 조금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쉽게도 높은 탐미욕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음악을 듣고 평가하는데 익숙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듣고 배운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조성된 문화적 흐름을 따라가는, 마치 우리가 주말마다 영화 안내광고를 훑어보듯이, 연주회 프로그램을 찾아나선 새로운 향유층일 뿐이었다. 음악을 음악으로 즐기기 위해 모인 연주회 청중을 앞에 둔 음악가들은 집중적인 효과와 강력한 선율을 주조로한 새로운 표현법을 마음껏 고양시켰으며 이렇게 하여 음악은 끊임없이 표현의 강도를 고양시킨 양식으로 발전해갔다.

 

시민계급이 음악의 주된 고객이 되고 또한 그들의 정서생활에 음악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예술로 애호받게 되자 음악가들도 이제 실용적인 목적에서 순수하게 시민들의 정서와 의지를 표현하는 쪽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음악가들은 궁정에서의 실용 음악과 귀족의 주문에 따른 작곡 행위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공적인 직책에 연연하는 일도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음악가에게는, ‘이것은 나의 작품이라고 명확히 선을 그어두는 일이 필요해졌다. 그것은 예술적 독창성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궁정의 만찬용으로 작곡된 곡이거나 어느 귀족이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몰래 음악가에게 청탁한 곡의 경우와 달리 공개 연주회장에 돈을 내고 몰려든 시민들을 겨냥한 곡에 대해서 이제 음악가들에게는 당당히(예술적 독창성의 보호를 위해), 그리고 필연적으로(이를테면 지적 재산권 보호를 위해) ‘이것은 나의 작품이란 의지를 공공연히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중엽, 떠오르는 시민 계급의 문화적 감성과 정치적 이상, 그것의 음악적 표현이 바로 모차르트이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