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장애를 이겨낸 불멸의 음악가 베토벤









베토벤의 주요 음악사


프랑스 혁명은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귀족 계급과 지식인의 보금자리인 살롱이 폐쇄당했다. 두세기 동안 지식사회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온 살롱은 혁명 이후 불과 10여 년만에 그 권위가 무너졌다. 정보의 교감과 토론의 광장이었던 살롱이 무너지자 저널리즘이 탄생하였다. 지식인들은 더이상 살롱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보다 생생하고 광범위하고 가치있는 정보들이 신문지상에 흘러넘쳤다. 신문은 자연히 지식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독할 수 있도록 신문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 대중사회의 광범위한 갖가지 이야기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독자들은 신문을 통해 지식을 얻고 교양을 키웠다.

 

신문이 발달하자 문학에도 새로운 변화가 왔다. 작가들은 서재에서 명상하는 시간 보다는 신문을 들추어 보기 바빴다. 신문에는 생생한 현실 속의 구체적인 사건들이 넘쳐났다. 독자들 또한 철학적인 소설보다는 생동감 넘치는 소설을 더 원했다. 하여튼 소설은 신문보다 재미있어야 했다. 작가들은 생동감넘치고 강렬한 작품을 써냈다. 작가들에게 일반 독자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인세(印稅)라는 개념도 새로 생겨났다. 신문과 독서를 통해 스스로 교양을 키운 시민계급이 문학 독자가 되었다. 작가들은 교양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고 그들은 책값을 냈다. 작가들은 이들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한편 이들의 기호에 맞는 소설을 쓰기 위해 사회 현실의 다양한 모습에 눈을 돌렸다.


그 폭풍의 1792년에, 프로이센 공국의 본 지방에서 자란 한 청년이 덜커덕거리는 마차를 타고 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해에 하이든은 유럽 전역을 통틀어 가장 창조적인 음악가로 대접받고 있었으며 그의 상대로 꼽혔던 모짜르트는 지독한 병고 끝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장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조지 워싱턴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고 독일의 지성 괴테가 바이마르의 극장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포병 중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파리의 정가에 두각을 나타낼 즈음에 베토벤은 라인 강을 따라 빈으로 오고 있었다.


야심찬 스물두 살의 이 청년은 이미 본에서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나 그의 진정한 욕심은 음악의 본고장 빈에서 작곡가로 대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빈은, 파리가 정치의 본산으로 주목받는데 비해 음악의 집결지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경탄할 만한 활동이 유럽 일대의 젊은 음악도들을 빈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개인적 일생은 비참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의 음악사적 운명은 실로 좋은 시절과 조우한 행운 덕으로 다채롭고 광휘로운 기록으로 가득차 있다. 런던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본에 머물러 베토벤의 초기 악보를 지적해 주었던 하이든, 그리고 1787년에 잠깐 베토벤의 연주를 들어주었던 모짜르트. 이 두 위대한 음악가의 업적은 고스란히 베토벤의 혈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짜르트가 발전시킨 음악 양식들, 특히 더욱 발전되고 개척될 여지가 있는 소나타 양식의 모든 것을 흡수통합하여 쇤베르크 이전까지 모든 음악가들의 생체 리듬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던 것이다. 베토벤이 이룩한 소나타 양식은 이후 음악가들이 도저히 그 자장권 내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완벽한 건축적 구성미를 가진 것이었다. 아울러 베토벤의 음악은 프랑스 혁명이 몰고온 유럽 전역의 대변혁과 자신의 천부적인 창조성이 높은 차원으로 맞부딪쳐 빚어낸 이중주였다.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의 물꼬를 튼 베토벤은, 오로지 철학사의 칸트와 정치사의 나폴레옹, 그리고 문학사의 괴테 정도만이 한 자리에 비교될 수 있을 뿐인, 게다가 음악사에는 따로 비견할 대상을 찾을 수조차 없는 유일무이의 거성이다.

 

베토벤은 또한 지휘를 작곡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최초의 예술가적 지휘자였다. 그것은 자기 작품은 자기가 해석하고 지휘해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1바이올린 주자와 건반 주자들이 지휘를 담당했던 시기에 지휘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운 사람이 베토벤이었다.

 

그의 지휘는 희극적인 비극이었다. 귀머거리이자 고집불통인 베토벤의 지휘는 내면적 고통에 몸부림치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불구의 거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원들은 베토벤을 거들떠 보지 않고 제1바이올리니스트를 봐야만 했다. 베토벤 밑에서 연주를 했던 자이프리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귀는 오직 자신의 작품을 향해서만 열려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표현을 지시하는 그의 제스츄어는 너무나 다중적이었다. 그가 디미누엔도를 지시할 때는 전신을 아래로 낮게 웅크린 동작을 했는데 너무나 지나쳐서 피아니시모 부분에서는 보면대 밑으로 기어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다가 점점 강한 소리로 전환할 때는 마치 구멍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하듯이 몸을 일으켜서 총합주 부분에 이르면 발가락을 세워 발돋움을 하고 서서 마치 거인처럼 팔을 벌려 하늘 끝까지 솟아 오를 듯 휘저어댔다.”

 

베토벤의 거듭된 파괴와 창조의 양식사는 대체로 다음 3기로 나눌 수 있다. 여느 사람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삶 역시 계단의 직각처럼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은 3기 구분은 음악학자의 공통적인 견해와 틀리지 않다.

 

1기는, 20세기 초의 음악학자 뱅상 댕디에 따르면 모방의 시기로 불리는 때로써, 빈에 정착한 베토벤이 대략 1802년까지 작곡한 곡들을 가리킨다. 이 때에 베토벤은 주로 초기 고전주의자들의 전통에 의지하고 있었다. 초기 피아노 소나타 10 곡과 1, 2번 교향곡 등이 그 예이다. 최초의 소나타 3곡은 하이든에게 헌정한 것으로 이 노대가의 체취가 짙게 묻어 있는 작품이며 1797년의 피아노 소나타 역시 하이든과 모짜르트에게서 충분히 들어볼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다. 다만 베토벤의 이후 작품에 밑바탕이 될 폭풍같은 정열은 두 대가의 그것과 달리 격렬하고 풍부한 음향적 처리를 동반하고 있다.


2기는 대략 1816년 경까지의 시기로 교향곡 3번에서 8번까지, 에그몬트서곡, 코리올란서곡,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협주곡의 신경지를 개척한 3,4,5번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얼린 협주곡이 작곡된 시기이다. 이 시기야말로 거성 베토벤의 음악이 완전히 정립되는 황금기였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표준적이고 상식적인 고전음악의 모든 이디엄이 이 시기에, 바로 베토벤에 의해 완성되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당대의 상류 교양층이었다면 베토벤의 2기 작품들을 선뜻 옹호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19세기 초의 음악적 표준은 아직 하이든과 모짜르트였다. 그런데 본에서 온 이 괴팍한 청년은 하나의 동기에서 다른 동기로 대담하게 달려나가거나 긴장과 이완의 급격한 변환을 꾀하거나 연주자들의 기교를 폭력적으로 고양시켜 악기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음향학적 비명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게다가 베토벤은 선배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고집하였다. 합스부르크가문의 총애를 받은 하이든이 평생 하인의 복장을 하고 살았지만 베토벤은 한번도 굽신거려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베토벤은 누구의 명령으로 작곡한 일이 없었으며 완성될 날짜를 정해 놓고 악보에 매달린 일도 없었다. 그의 강렬한 개성은 한 독특한 스타일리스트의 제스츄어가 아니라 이전 세기와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19세기 초의 격렬한 근대적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그는 근대의 이념이 표증하듯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만들었다.

 

베토벤이 죽고난 즈음부터 독일의 지성계를 지배한 사상도 칸트나 횔덜린 같은 프랑스 혁명 지지자의 것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 질려버린 피테, 아른트 등은 민족주의질서를 지배했다. 이들은 이성보다는 감성과 상상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낭만주의적 강조는 민족을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적 인격으로 보는 이론으로 정리되었으며 피테의 독일인에게 고함은 이같은 일종의 문화적, 인종적 민족주의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독일 민족 특유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언제나 독일 민족만의 이상적 공동체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정치적 욕망이 숨어 있었다. 히틀러가 그대로 입증하고 있듯이 이같은 유토피아적 민족주의는 현실에서는 언제나 파괴와 책동으로 귀결되곤 하였다.

 

베토벤 이후의 독일어권 음악사도 이 민족주의 경향을 직간접적으로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베토벤이라는 큰 봉우리를 넘어선 독일 문화권의 음악가들에게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하산할 것인가밖에 없었다.

 

낭만주의의 공통된 우상은 베토벤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베토벤의 적자라고 주장하였다. 리스트, 바그너, 볼프로 이어지는 혁신주의자들은 이제 그만 베토벤의 그늘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였다.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로 이어지는 회귀주의자들은 그러나 베토벤!’이라고 주장하였다. 시벨리우스나 차이코프스키가 자국 내에서 민족음악가로 대접받듯이 어떤 면에서 이들은 모두 독일 민족주의 음악가였다.

 

리스트는 인간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새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독일파라고 일컬어지는 실험적 노선이었다. 리스트가 보기에 슈만은 변혁기에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자였다. 반면 슈만은 음악신보를 통해 멘델스존, 슈만 등 고전적인 성향의 작품의 중요성을 선전하였다. 그러나 리스트의 흐름이 더 주도적이었다. 무엇이 과연 참답게 베토벤에 이르는 길인가. 리스트는 베토벤으로부터 창조적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바그너가 가세하였다. 1850년대 이후 독일 음악권은 완전히 바그너로 정리되었다.

 

점차 명성을 얻은 브람스가 1860년 경부터 이 논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신독일악파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였다. 당대 최고의 음악평론가 한슬릭은 바그너에 반대하고 브람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북유럽의 신화를 바탕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부흥을 꾀하고 있던 바그너는 이같은 반대에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바그너는 지휘에 관하여란 글에서 브람스을 정절 수호자라고 비웃었다. 베토벤을 그대로 베끼는 모방자라는 독설도 퍼부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베토벤은 자기의 시대가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를 열어젖히는 분수령임을, 다름아닌 바로 자신의 음악으로 깨달았으며 이를 완전히 증명하였다. 게다가 그는 오직 자기자신을 위하여 작곡한 최초의 근대적 예술가였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자기자신의 고난과 환희를 위해 작곡하는 것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모든 작곡가들이 귀족과 후원자를 위해 곡을 썼지만, 베토벤은 오로지 자기 내면을 위해 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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