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야기]죽음의 화가 뭉크의 미술사 1부









에드바르 뭉크

스스로를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칭하였던 뭉크는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작가이다. 그의 그림은 우울하고 슬퍼 보여 문득 마주쳤을 때 심연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보게 만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는 늘 외로웠고 우울하였다 동시대에 살아간 고흐에 비하면 많은 사람들의 찬사속에 살았으면서 무엇이 그렇게 그를 외롭게 했을까? 언제나 그의 삶과 예술세계는 아름다움보다는 불안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젖어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의 일생

18631212일 노르웨이의 한 시골에서 크리스티안 뭉크라는 의사가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뭉크는 태어날 때부터 언제 죽을 지 모를 것 같은 병약한 아이로 태어났고, 그가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서른 살의 나이에 페결핵으로 죽었다. 6세가 된 바로 후 크리스마스를 지났을 무렵 뭉크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밤의 전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 침대의 곳에 가면, 어머니는 평상시와 다른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키스를 해 주었다.

 

뭉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정신분열을 일으켰고 그 일은 뭉크를 괴롭혔다. 13살의 크리스마스 날 피를 토하며 죽음에 직면한 뭉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다시 건강해진다면 신에게 봉사하겠다고그 후 뭉크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의 누이 소피에가 어머니와 같은 병인 폐결핵으로 열 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후 남동생을 잃었고 여동생 마저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광기와 우울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뭉크는 죽음의 무게와 의미를 일찍 느끼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응시하고,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것이 뭉크 예술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었다.

 

뭉크의 이런 환경은 어릴 적부터 일상적으로 죽음과 병에 노출될 수 밖에 없게 하였다 뭉크는 어릴적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정서가 불안정하게 되면, 그림을 그려 안정시킨다고 하는 치료적 방법을,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손에 넣고 있었다

 

장성한 뭉크는 화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뭉크가 기술자가 되는 것을 바랬지만, 결과적으로 병약한 아들은 기술자로서는 일을 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뭉크의 재능을 눈여겨본 이모의 지원을 받으며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뭉크의 지금까지의 상식을 일탈하는 작품들은 그 기술이나 표현을 미디어에 낮게 평가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내용만이 아닌 부르조아 계급이나 전위 단체에의 공격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그때, 어느 누구의 반대 없이 장학금을 거둔 것이, 병든 아이의 혹평에 반발해 자연주의를 기조에 그려진 이었다. 전통 적인 기술과 흐르는 품위를 보장받은, 이 시기의 걸작중 하나이다.

 

1880년대 이 후 뭉크는 프랑스를 여행하며 당시 불기 시작한 인상파의 흐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1890년 이후 국비 장학금을 받으며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뭉크는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뭉크를 '버르장머리 없는 이단자'라는 평가했던 노르웨이와는 다르게 문화의 도시 파리는 현대적인 감각의 에펠탑이 완공되고 마네, 모네 등의 인상파 화가와 상징주의 문학가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리의 예술적 분위기와 후의 독일에서의 신이상주의적 흐름은 화가로서 그의 눈을 열어주었으며 뭉크 예술의 전환기를 가져다 주었다.

 

파리 유학 후 뭉크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행해진 그의 전람회는, 악평을 받았다. 주최자 측은 그의 작품에 대한 아무런 설명없이 시작하여 처음 보는 사람들의 당혹감을 불러 일으켜 개최와 동시에 금새 논의를 야기해, 1주간에 폐쇄되었다이후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경제적으로도 핍박 받고 인간관계로 힘들었던 뭉크는 더욱 열심히 작품에 매달렸다. '불안'은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강력한 힘의 '검은 천사'였던 것이였다. 당시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결정의 시작이다. 우리들이 죽는 것이 아니고 세계가 우리로부터 사라져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악평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금부터 받아 들여져 가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해, 뭉크 자신은 이 평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예상대로, 2개월 후에는 베를린에서 전람회가 재개 개최되었다 이후 뭉크의 예술은 그만의 개성으로 여타 상징주의 화가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들은 마치 지옥의 유황불에서 막 건져올린 듯 흐물흐물하고, 사람들은 그림 속에서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그의 독특한 화풍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 주어 결국 다음 해에는 그의 예술은 베를린에 받아 들여졌다 .

 

이 소란을 이후로, 독일의 미술가 협회는 분열했지만, 덕분에 현재는, 자유로운 예술 표현에 이해가 있는 나라의 필두로 오르게 되어 있다. 이후 독일은, 표현주의의 뭉크 예술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갔다감수성 풍부하고 용모도 좋은 예술가인 뭉크는, 친구와 같은 여성을 사랑하는 애증극에 말려 들어갔다. 가족을 차례 차례로 잃은 과거로부터 기억은 극도의 우려와 고뇌로 가득 찬 여성 문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 현저하게 영향을 미쳤다.

 

1900년 전후로 튤라 라르슨이라는 여자가 자살을 기도하며 그에게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했고 결혼을 원치 않던 뭉크는 이 사건으로 더욱 방황하며 보헤미안적 생활에 빠지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이라고 하는 존재는, 논쟁이 생기고, 받아 들이기 어려운 존재로 계속 되었다.

 

1908, 그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알코올에 빠져 이 타격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서 사나토리움으로 긴 요양 생활을 보내게 된다.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병으로 회복하는 하나의 무기로 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지만 캔버스에는 마음의 안정의 안정을 위해 그의 작품은 더욱 밝아지고 활발해졌다. 그런 그의 작품은 서서히 생명감을 가득 채운 밝은 색과 터치가 증가하고 있었다.


간신히 마음의 안정을 얻었을 때, 그는 노르웨이에 아틀리에를 짓지만, 결코 안식을 요구해 그 땅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예술의 원점이 고향의 경치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침식한 정신을 부정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게 해 무디어지게 해 서로가 공존해 살아 갈 방법을 선택한 것일 것이다.

 

세잔이나 고호와 맞먹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후반기는 병마와 방황과 고독으로 점철되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하고 유럽 도시를 유랑하며 그의 인생 말년까지 고뇌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나치가 독일을 점령하던 1933년 뭉크의 작품들이 '퇴폐예술'로 낙인 찍혀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고, 그의 이모까지 죽자 뭉크의 말년은 고독하고 폐쇄적인 생활을 보내었다. 결국 1944년 뭉크는 그의 자택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에드바르 뭉크의 화풍

뭉크의 그림은 수수께끼에 쌓여있지만 계속 보는 것으로 그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고 화가 자신 생각하고 있었다.사랑이 눈을 떠」 「사랑의 개화와 죽음」 「생의 불안」 「죽음4개로 나눌 수 있는 생명의 프리즈로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은, 1902년초 계통으로 차례로 전시되었다.


그만의 감수성에 대담하고 강렬한 구도, 인상적인 색채와 음영의 배치, 심리적 묘사로서 뛰어드는 배경의 힘. 또한 그는 가차 없이 생각치도 못한 장소에서 인물의 부분을 잘라낸다. 그것들은 뭉크가 화가로서 평가되어야 할 최대의 능력일 것이다.감상자의 눈은 비스듬하게 횡단하는 원근법으로 끌여 들여 선명하고 강렬한 색으로 인한 불안을 체험하는 것이다.

 

또한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들

1. 병든 아이


 

죽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다른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마지막 신음과 숨결까지 지켜본 누이 소피에의 모습과 슬퍼하는 이모 카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초점이 두 인물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하여 "죽음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구상에 있어서는 표현주의적이고, 화면구성에 있어서는 입체주의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병약한 사람이 직면하는 생의 불안을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하여 그려낸다

 

뭉크는 평생 이 작품을 간직하기 원했는데 누나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2. 봄 1889


생생하기만 한 생명의 빛도, 병약한 신체에는 너무 강한 자극이 된다. 희망으로 한가득 차는 햇볕을 피해 병든 아이는 눈을 외면한다. 이 아이가 병이 다 나아 이방을 나갈 날은 아직도 멀은 것 같다. 밝게 행복감 있는 색채와의 대비에, 한층 더 그 슬픔이 눈에 띈다. 선명한 색채가, 인상에 남는다 병든 아이의 누이와 이모를 그린 듯 하다.

 

3. 뱀파이어

원래 <사랑과 고통>이라고도 불렸던 이 작품은 사랑과 고통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으며 남자를 끌어안은 여자는 남자의 개성을 파괴하는 이중성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젊은 시절 프랑스 유학전에 깊게 사랑했으나 자유분방한 기질로 뭉크에게 상처를 준 여인에 대한 기억이 이 작품을 만들게 하였다.

 

4. 사춘기

냉철한 관찰력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제 성에 눈을 뜬 소녀의 내면을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과 불안으로 표현하고 있다.



홀로 덩그러니 침대에 앉은 소녀는 두려움에 떠는 큰 눈망울과 웅크린 자세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섬세하게 나타내며, 소녀 뒤의 기묘한 그림자가 소녀의 불안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스물 두살의 청년이 표현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만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엿보인다.

 

불안유채 1894

불안목판 1896

 

뭉크는 같은 모티프를 판화버전과 몇번이나 반복해 만드는 것이 많았다.절규도 판화 버전을 만들었다. 판화 작품에서는, 적과 흙만을 선명하고 강렬하게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5. 절규

 "친구 두 명을 따라 길을 걷고 있었다.

거리와 피오르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태양이 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너무 슬펐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마음이 너무나 초조하여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어 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처럼 검푸른 피오르드와 거리 위로 낮게 깔린 불타는 구름들을 바라보았다.

 

두 친구는 잠시동안 나를 보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그 자리에 줄곧 서 있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연의 새된 비명이 대기를 갈기갈기 찢는 것을 느꼈다. "

 

위의 이야기는 뭉크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된 일을 일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그림 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다리 위에 두 명의 남자가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전경에는 날카롭고도 강렬한 모습으로 관찰자에게 다가온 세 번째 형상이 서 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그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경직돼 있으며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모든 것을 꿰뚫는 외침을 위해 입을 벌리고 있다. 이 인물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배경을 이루는 피오르드식 풍경은 하나의 '정신의 지대'로서 그 형상의 내면적 삶을 반영한다. 하늘은 핏빛으로 빨갛게 채색되었다. 물위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교회의 탑과 같이 잔잔한 요소들은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절규>의 채색은 자연주의에 입각한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색채의 신빙성'을 고수하였다. 피처럼 붉은 빛의 저녁 하늘이 비치는 검푸른 물은 가을 기운이 나는 빛과 날씨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모든 것이 전경에 있는 인물의 얼굴 표정과 자세처럼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그러지고 고조되어 있다.

 

6. 생명의 춤

이 작품은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보이고 있으며 뭉크의 인생관을 응축시키고 있다.




여름 밤의 해변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데 왼쪽의 흰색 옷의 여인은 인생의 가능성과 기대를 상징하고,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을 나누며,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서있는 검은 옷의 여자는 자나간 과거를 되돌아 보고 있다. 그의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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