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의 전개 과정
1. 제1차 원정
1096년~1099년. 셀주크 튀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호소에 응한 서유럽의 기사들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를 공격해 학살, 약탈 등을 저지르면서 예루살렘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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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슬람교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 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들 몇 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2. 제2차 원정
1147년~1148년. 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 기독교도와 군소의 도시 등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교 측이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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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드 2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어떻게든 간신히 팔레스타인까지 도착했지만 다마스커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제3차 원정
1189년~1192년. 1187년에 이슬람교 세계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만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에 의해 점령, 탈환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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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낙마해 익사했다. 그리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악콘을 탈환하였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귀국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악콘을 확보한 것으로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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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4차 원정
1202년~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아니고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도항비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료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 다음에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 라틴 제국이 건국하였다.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을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동로마제국은 57년 후인 1261년에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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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비 십자군 : 1209년에서 1229년까지 있었던 기독교의 십자군이다.
* 어린이 십자군 : 어린이 십자군은 10대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십자군에 가담한 광신적인 종교현상을 말한다. 스테판이라는 10대 소년이 우두머리였으며, 출애굽 설화에 나오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주장과는 달리, 유럽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수장되고 말았다. 이들중 노예로 팔린 소년들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관용으로 해방되었다.
5. 제5차 원정
1218년~1221년. 악콘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머나먼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대군을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 전 국토를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6. 제6차 원정
1228년~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종종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그레고리오 9세는 교회로부터 파문된 채로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것을 구실 삼아,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황제군에게 격퇴되어 1230년에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풀어주었다.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7. 제7차 원정
1248년~1249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000명 남짓한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정을 하게 되지만, 아유비드 왕조의 살라딘 2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8. 제8차 원정
1270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재차 출병, 아프리카의 니스를 목표로 삼았지만, 도중에 서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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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결과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걸출한 지도자였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심지어는 적인 소년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 인해 야기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동로마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 정교회 교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역사 최초의 분열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의 변화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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