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갈릴레이의 생애와 공헌









갈릴레이의 생애


기울어져 가는 피사 탑에서의 물체 낙하실험을 하고, 피사 대성당의 청동램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으며, 종교재판 후에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갈릴레이.


벌거벗은 세계사 E88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근대 물리학의 창시자인 갈릴레이는 피사에서 출생했다. 1575년에서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가졌다. 1581년에 피사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하여 피사의 사탑 예배당에서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여 맥박계에 응용했다.

 

벌거벗은 세계사 E88

  

벌거벗은 세계사 E88

 

1583년이후 수학연구를 시작하여 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도가 되고 1585년에 피사대학을 중퇴한 후 피렌체에서 수학연구를 계속했다. 89년에 피사대학의 수학강사, 후에 베네치아 공화국(북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동안 축성술, 기계공작 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연구하다가 동력학의 연구로 진출했는데, 우선 낙체의 문제를 추구하기 위해 진공 속에서의 낙체에 관해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추론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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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결과를 사면상(斜面上)의 실험으로 실증함과 동시에 그 극한의 경우로서 수평면상에서는 일정한 속도를 가진 물체는 그 속도를 잃는다는 등속직선운동을 추리하여 이른바 관성 법칙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진공 중의 탄도운동은 연직선상의 등가속도 운동과 수평선상의 등속운동의 합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명백히 함과 동시에, 그 궤도는 그 양선을 포함하는 면에서 포물선이 된다는 것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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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609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해서 그 배율을 높여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사용, 목성의 위성을 비롯한 여러 별을 발견함으로써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던 ‘지동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10년에는 피렌체 공국의 구주(舊主)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소속의 제일 수학자가 되었는데 형식상으로는 피사대학 교수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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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지동설을 둘러싸고 낡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로마 교황청 당국자 등과 타협을 보지 못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어 갈릴레이는 수년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 후 갈릴레이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오르바누스 8세가 즉위하자 다시 새 학설을 담은 책을 낼 것을 결심하고 수년 동안 집필한 것을 당국의 검열을 마쳐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라는 제명으로 32년에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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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저서에는 표면상 천동설의 승리를 구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이 옮음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표면상 굴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생에는 엄중한 감시하에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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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안 파도바 시대의 성과를 집대성한 [역학대화]를 완성하여 감시의 눈을 피해서 38년에 네덜란드의 한 서점에서 간행했다. 이 무렵 실명하게 되어 감시도 다소 완화되고 죽기 직전에는 토리첼리도 제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죽은 후 공식으로 장사를 지내는 일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가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가 금서목록에서 풀린 것은 1835년이 되어서 였다.



갈릴레이의 공헌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운동과 지상물체의 우동은 별개의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했고 낙하물체도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실험을 통해 공기마찰에 따라 어느 정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제외하면 무게에 관계없이 동일속도로 떨어진다는 ‘자유낙하에 대한 법칙’을 발견했고, 이는 1971년 공기가 없는 달표면에서의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그의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후에 뉴턴의 운동 제1법칙으로 확립된 ‘관성의 법칙’이고 그 외에도 진자의 ‘등시성 발견’, ‘망원경 발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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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험을 통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의심조차 금기시되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점일 것이다. 특히 그는 달표면이 울퉁불퉁하며 많은 구덩이가 있다는 것, 태양의 표면에 흑점이 있다는 것, 금성의 모양이 달처럼 변해보이며 그 크기도 변한다는 것, 목성에 4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의 집단이라는 것 등을 발견하고 지동설을 적극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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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정한 과학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수학적 결합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신념 하에 2천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신봉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론을 철저한 실험과 관찰로 검증을 계속하여 그의 오류를 바로잡았는데, 그의 이러한 실험 중심의 연구자세는 현대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가 출판된 이후 그는 많은 논란에 휩싸여 그의 옛 친구이던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나타내고 1633년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결국 자신의 신념을 형식상으로 철회하고 천동설이 옳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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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과학의 불양립성을 인식시켰으며 중세의 ‘가톨릭 세계관’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서의 전환을 재촉했다. 비록 그는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은 받았지만 그는 크리스트교의 권위를 내세운 불합리한 독단조차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후세에 독단론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또는 사상의 자유를 말살하려고 하는 지배집단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갈릴레이는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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