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
①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7세기 말엽으로 오늘날에는 てんのう 라고하지만 고대에는 스메라미코토라고 발음했다고 한다.
② 중국풍 칭호인 황제나 천자 등이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병용되어 왔고 대일본제국헌법 체제하에서도 공식문서에 황제라고 명기되기도 하였으나 1936년에 천황으로 통일되었다.
③ 2-3세기 경의 일본에서는 주로 혈연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의 공동체들이 발달되었고 아직 통일된 고대국가는 탄생하지 않았다. 4세기부터 7세기 중엽에 걸쳐 이전에 소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각지의 호족들이 모여서 일본 최초의 통일 정권인 야마토(大和) 조정이 성립되었다. 야마토 조정은 야마토 지방(현재의 나라현)을 중심으로 해서 일본의 서부지역을 지배함. 천황이라는 칭호가 제정되기 전에는 군주를 '오키미(大王)'라고 불렀으며 이 오키미가 나중에는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④ 야마토 조정이 성립된 후에도 세력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키미의 지위를 둘러싸고 유력 수장들간에 계속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673년에 오키미의 자리에 오른 덴무(天武)대왕은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높이고 권력기반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으므로 왕권을 강화하여 스스로를 천황이라고 자처한다. 덴무대왕은 스스로를 아키쓰미카미(現御神:살아있는 신)이라 선언하고, 율령을 편찬할 것과 황실의 계보 및 옛이야기들을 기록해둘 것을 명했다.
⑤ 이러한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율령에서 정식으로 천황이 규정되고, 황후와 황태자도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또 덴무대왕 사후에 그의 부인인 지토(持統)천황이 왕위를 계승하여 율령이 시행되었다. 따라서 율령에 의거해서 최초로 천황의 지위에 오른 것은 지토천황이며, 그 이전의 천황들은 나중에 소급해서 천황호를 붙인 것이다.
⑥ 일본의 천황 계보에 대해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라는 역사서에 기술이 되어 있다. <고사기(古事紀)>는 일본의 고대국가 건설이 일단락 되는 712년에 완성되었고, 720년에는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완성되었다. [고사기]는 천황의 혈통을 명확히 한다는 정치적 목적에서 편찬된 책으로 神代(신들의 시대)로부터 스이코(推古) 천황에 이르는 황실의 연대기와 계보, 설화를 담고 있으며, [일본서기]는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 천황에서부터 지토 천황(645-702) 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한 한문으로 쓴 역사서이다. 일본의 고대사는 바로 이 두 권의 책에 의해 그 기본틀이 만들어져 왔으나 역사서라기보다는 신화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근대 이후에 사료 비판이 이루어져 대부분의 내용이 신빙성이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이 두 책을 통해 천황의 권위와 지배는 신들의 시대부터 약속된 것이며,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화가 확립되게 되었다.
⑦ 율령제에 의해서 천황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7, 8세기뿐이고 9세기 후반부터는 후지와라(藤原)에 의한 귀족정치가 이루어졌고, 이후는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 에도(江戶) 막부로 이어지는 무사들에 의한 무가정치가 이루어져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약 천년 동안 천황은 정치적인 실권을 갖지 못하였다.
⑧ 무사들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져 오는 동안에도 일본의 실권자들은 천황가를 폐지하지 않았고, 천황이 쇼군(將軍)을 임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권력의 정통성을 이어온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천황이 입법, 행정, 사법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입헌군주로서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정치적 실권을 갖지 않는 상징천황이 되었다.
2. 건국신화 - 천황의 신격화
① 천황가의 최고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중심으로 해서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② 건국신화를 통해서 결국 천황가가 신의 후손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천황은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세계, 즉 신들의 세계와 연결된 신성한 존재로서의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근대 이전 천황의 불안정성/명목성
① 고대부터 천황제가 제도화되었지만 결코 천황의 지위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계통의 왕조가 존재했다는 설도 있으며, 역사상 두 명의 천황이 병립한 경우도 있었으며 정치적인 투쟁 과정 속에서 세력관계에 의해 천황이 교체되기도 함. 내란의 승자가 천황이 되기도 했고, 섭정이나 막부의 힘에 의해 천황이 폐위된 적도 있으며, 천황자리를 둘러싼 권력다툼이 있기도 했다.
② 12세기말의 가마쿠라막부 시대에는 조정과 막부가 권력을 나누는 2원체제가 성립되었다로써 천황의 지위가 약화되었고, 무로마치막부, 에도막부에 들어와서는 천황은 명목상의 권위만을 갖게 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는 전국다이묘(戰國大名)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쇼군이 임명되도록 하였으나 이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실질적으로 천황이 실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③ 에도막부의 역대 쇼군들도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였으나 천황은 막부에 의해 공적·사적으로 행동의 제약을 받았고 국정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으므로 에도시대에도 실질적인 군주는 쇼군이었다.
4. 존왕사상의 발달
① 존왕사상은 18세기말 국학(國學)파와 미토학(水戶學)파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 발전된 사상이다. 국학의 대성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고사기>에 전해지는 신화에 의거해서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그 자손인 천황의 황통은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고 보았고, 나아가 이를 근거로 일본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이 독자적이고 뛰어난 국가이자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②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이 동아시아의 중심이었고 일본은 주변국의 지위에 지나지 않았는데, 국학자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벗어나 일본국가와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고자하는 동기가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모토오리의 사상은 이후에 문하생들을 통해 촌락의 지도자층에 침투하였고, 18세기말-19세기 초에는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③ 또 다른 대표적인 존왕사상가는 미토번의 유학자 아이자와 야스시(会澤安)를 들 수 있다. 아이자와는 천황 아래에 모든 토지와 인민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결국 인민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가치적 우월성과 서양의 침략 위험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서양을 물리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일본국가체제의 모범을 고대의 천황제 국가에서 찾고 천황제를 기반으로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아이자와의 논리는 하급무사층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④ 봉건적인 체제가 동요하고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일본의 장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이 존왕양이론을 지지함. 실질적으로 존왕양이 사상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며, 존왕양이 사상을 지향하는 하급무사들인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나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에 의해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져 봉건체제가 무너졌다. 메이지 국가체제가 확립된 후 이들의 천황관 및 천황을 핵심으로 하는 국체관념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교화를 통해 민중들 사이에 침투되었다.
5. 국민형성정책과 근대천황제
① 메이지정부의 정권이 안정된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이 제정되었다. 메이지 헌법에서는 천황이 입헌군주임을 명기함으로써 천황에게 법적 기반을 부여하였는데, 메이지헌법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천황제를 고대천황제와 구별해서 근대천황제라고 함(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 후의 천황제는 상징천황제라고 함).
② 근대천황제는 절대주의적 천황제의 창출로, 메이지 헌법에 의해 천황제가 입헌적인 형식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천황은 실제로는 초법적인 존재였다. 메이지헌법은 흠정헌법으로 천황이 만들어서 국민에게 하사하는 형식을 띠었으며, 황실전범에서는 황위계승을 비롯하여 황실의 각종 제도를 규정하였다. 황실전범은 메이지헌법과 동등한 최고법규로 규정되어 황실은 헌법과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어 있다.
③ 메이지 헌법 제1조에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에는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으며,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국가를 통치하고, 군대의 통수, 선전포고, 강화, 조약의 체결, 관리의 임명과 파면, 긴급 칙령의 발포 등 광범위한 대권을 가지게 되어있다. 또한 의회와 내각이 있어서 그 권한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천황의 대권사항이 많았고 국가의지의 최고 결정은 천황의 재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되어있다. 나아가 이러한 천황의 지위에 대해 일반민중은 신민으로 규정되어있다.
④ 천황제의 법적 기반인 메이지 헌법과 함께 메이지 정부에 의해 발포된 군인칙유와 교육칙어는 천황에 대한 민중의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도덕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
[군인칙유는 1882년 메이지천황이 군인에게 내린 말씀으로 천황에게 충성하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황군(皇軍) 건설을 위해 내린 것임. 군의 통수권자인 천황에 대해 충절과 예의, 무용, 신의, 질소(검소)의 다섯 가지 덕목을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으며 메이지 정부는 군인들에게 군인칙유를 암송하도록 함으로써 그 보급을 꾀하였음.]
[교육칙어는 1890년 발포한 메이지천황의 칙어로 일본 교육의 근본 방침을 명시하고 있다.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덕목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전 국민이 하나의 가족이라고 하는 가족국가관에 입각해서 국민들이 충군애국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교육칙어를 전국 각 학교에 배포하여 이를 예배하고 봉독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침투시켜 나갔음.]
⑤ 이 시기에 천황과 관련된 국가적 경축일이 제정되게 되었다.
[ 천장절은 1868년에 정해진 일본 최초의 국경일로 천황의 탄생일임. 천황의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에서 天長이라는 명칭을 붙임.
기원절은 1873년에 제정된 경축일로, 일본서기에 기술된 초대 진무천황의 즉위일인 1월 1일을 태양력으로 환산한 1월29일을 축일로 정함.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폐지되었다가 1966년부터 다시 [건국기념일]이라는 명칭으로 2월 11일로 정해짐.
메이지에서 쇼와 초기에 이르기까지 10개 정도의 경축일이 제정되었는데, 이것은 대개 천황과 관련된 것이었다. 1927년에는 메이지천황 탄생일인 11월 3일을 경축일로 정하여 명치절이라 하였다. 경축일에는 신사나 궁전,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의례를 거행했는데, 기념식전에서 히노마루가 게양되고, 기미가요가 제창되고, 교육칙어가 봉독되었음.]
상징 천황제
1. 천황의 법적 지위 : 국가/국민 통합의 상징
신헌법에서는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여 천황이 과거와 같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아니라 단지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만 존재한다. 전전의 메이지헌법이 천황을 신성불가침한 절대적 권력을 갖는 통치권자로 규정했던 데 대해, 오늘날의 일본 신헌법에서는 천황을 국가 및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천황제도를 흔히 상징천황제라고 한다. 헌법 제1장은 천황 및 황실에 관한 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제1조는, 일본국 및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라는 천황의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되어 있으며, '천황은 이 헌법이 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고,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지 않는다'(제4조 1항)는 조항이 있다. 즉 천황은 국정에 관한 권능, 즉 통치권 내지 정치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상징천황제의 핵심이다.
② 천황의 국사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필요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라고 되어 있다(제3조). 즉 국사행위의 정치적인 부분은 내각이 맡음으로써 천황의 국사행위는 정치성이 배제된 형식적/의례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외국대표가 오면 천황이 이들을 맞이하여 만찬을 베풀거나 황태자나 황태자비가 외국을 방문하여 외교관계를 돈독히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위 황실외교라고 불리는 식의 의례행위가 대표적인 천황 또는 황실의 국사행위라고 할 수 있다.
③ 천황은 총리대신과 최고재판소장의 임명권도 갖고 있지만 이것은 국회와 내각의 지명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에(제6조) 형식적/의례적인 범주에 속한다.
④ 또한 천황도 헌법에 의거해서만 행위할 수 있고 헌법을 존중하고 지켜야 하며, 황실전법과 황실재산도 법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제2조/제8조). 황실전범은 국회의 의결을 받도록 되어 헌법의 하위에 놓이게 되었으며, 황실재산은 국가에 귀속되고 모든 황실비용은 예산에 계상하게 되었다.
2. 상징천황제의 성립배경
① 상징천황제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상징천황제의 성립에는 미국의 대일점령방침, 국제여론, 일본정부의 자세, 일본 국내의 여론 등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신헌법 제정 시에 일본정부는 천황의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하려는 구태의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GHQ(연합군최고사령부)가 제동을 걸게 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상징천황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② 패전 직후의 국제여론은 천황 및 천황제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1945년 6월 미국에서 조사된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어떤 형태로든 천황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60%에 달했고,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일 경우 처벌한다는 의견이 10%를 차지했다. 즉 70%의 미국시민이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중국에서도 천황은 전범이며 천황제는 일본군국주의의 기반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다. 그 외의 연합국 정부 및 국민들의 입장도 대체로 천황은 군의 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로서 전쟁책임을 지고 재판에 회부되어야 하며, 천황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③ 그러나 일본국민의 여론은 절대적으로 천황제 존속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45년 12월 23일자 <니혼주보(日本週報)>에 의하면, 천황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95%에 달하였다. 혁신계인 사회당의 헌법개정안조차도 '주권은 국가(천황을 포함한 국민협동체)에 있다', '통치권은 분할하여 주요부를 의회에, 일부를 천황에 귀속시킨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일하게 공산당만이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국민에게 있어서 천황은 절대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메이지정부 이래로 천황을 신격화한 이데올로기적인 통합정책이 유효하게 작용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④ 반면, 미국인 중에서도 온건파는 천황은 일본사회의 안정요소라는 점에 주목하여, 일본에 공화제나 대통령제와 같은 서구식의 민주주의를 접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신권적인 천황제의 성격만 변화된다면 천황제와 민주주의는 양립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으며, 맥아더도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이었고 따라서 천황제를 폐지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④ 주목할 점은 미국정부가 종전과정에서 천황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천황의 항복명령을 받은 군대는 별다른 저항없이 무장해제에 응해 예상보다 훨씬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천황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수백만명이 희생되었는데도 천황의 위광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 천황이 종전조칙을 통해서 종전을 알리게 되자 별다른 국민들의 저항이 없이 점령군이 일본에 상륙하게 된 점 등도 미국을 놀라게 하였다. 맥아더는 '천황은 백만 명의 군대에 필적한다'고 미국정부에 보도했을 정도이다. 따라서 미국은 점령정책을 수월히 하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폐지하는 것보다 천황제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치적 판단을 하였다.
⑤ 그러나 천황제 폐지와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제여론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도 이것이 전전과 같이 군국주의화의 길을 걷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강구된 것이 일본은 일체의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을 명기한 헌법 제9조이다. 당시 천황의 전쟁책임과 관련하여 히로히토 천황을 퇴위시키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며, 일본 내에서도 천황제 존속을 위해서라도 히로히토천황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퇴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⑥ 맥아더는 히로히토가 퇴위할 경우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벌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상징천황제와 전쟁방기 및 전력 불보유 조항을 명기한 GHQ 헌법개정안을 일본정부에 제시하고 천황을 도쿄재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 안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하였고, 일본정부는 천황과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GHQ의 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⑦ 1946년 1월 1일 천황 히로히토는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를 통해 인간선언을 함. 인간선언이란 천황 스스로가 천황의 신격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조서에서 천황은 "나와 국민사이의 유대는 항상 상호 신뢰와 경외에 의해 맺어지는 것이지 단지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아키쓰미카미(現御神)라 하고, 일본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어서 세계를 지배할 운명이라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결국 천황이 천손강림한 하늘의 후예라는 신화에 의거해서 천황을 신성불가침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근대천황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⑧ 천황이 스스로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규정하고 난 뒤, 곧이어 상징천황제를 포함한 신헌법 초안이 제출되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천황은 신적인 존재에서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법적인 지위가 변경되게 되었다.
3. 상징천황제의 문제점
1) 국체 개념에 대한 논쟁
① 전전에 국체(일본이 지향하고 있는 본래적인 국가체제의 모습으로 천황이 통치하는 지배체제를 말함)란 '만세일계의 천황이 군림하여 통치권을 총람하는 것'이라고 규정된 법적 개념이었으므로 이것을 부정한 상징천황제는 전전의 국체를 부정한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② 그러나 일본의 보수적 지배층은 이러한 국체부정을 애써 부인하고자 법률적 개념으로서의 국체와 본질적인 의미의 국체를 구분하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즉 본질적인 의미의 국체(일본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천황의 위치, 천황에 대한 숭상)는 변하지 않았다고 해석함으로써 국민주권과 상징천황제 도입의 역사적 의의를 축소시키고자 한다.
③ 메이지유신 이전의 일본에서 천황은 통치권자가 아닌 국민통합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일본국헌법에 의해서 반드시 국체가 변경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국체가 변했다고 보는 국체변경론자들은 상징의 의미를 통치권이 없는 명목성/비정치성에서 찾으며, 국체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국체연속론자들은 국민통합의 핵, 일본민족의 아이덴티티의 핵으로서의 천황의 역할을 강조한다.
2) 상징천황제의 문제점(천황의 지위와 관련)
① 메이지헌법과 마찬가지로 신헌법은 제1장에 '천황 규정'을 두고 있다. 새로운 정치원리로서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 신헌법의 가장 큰 의의라고 하는데 반해 헌법 첫머리에 국민주권이 아닌 천황 규정을 두고 국민주권은 그 안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국민주권이 왜소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황위는 여전히 세습되며 황실전범이 정하는 순위에 따라 계승되는데 황실전범 자체는 메이지기에 성립한 황실전범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전후에 와서 황실전범이 국회의 의결을 요하는 법률이 되기는 했지만, 황실전범의 존재가 인정되고 황위계승이 그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헌법에서도 여전히 전전의 국체가 연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국사행위에 관한 규정의 애매함: 헌법 제7조의 천황의 국사행위 규정은 천황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인 행위인지 불분명한 표현들이 많이 있다. 또한 헌법에 규정된 국사행위 외에 천황의 공적 행위 중 어디까지를 국사행위에 준하는 것으로 해석할 것인가도 문제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천황은 국회의 지명에 기초해서 내각총리대신을 임명하게 되어있는데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하여 새로 임명된 대신에게 천황이 임명장을 주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장면은 단지 형식적인 의례행위가 아니라 천황이 마치 이들을 임명하는 듯한 어떤 신성성을 국민들 앞에 연출함으로써 천황의 권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③ 천황의 오코토바(お言葉, 천황이 국민들에게 내리는 말씀)문제: 국회가 소집되면, 개회식에서 천황이 옛 귀족원인 참의원의 특별석에서 인사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오코토바는 헌법에 규정된 국사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관례인데, 일본정부는 이것을 국사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전전에 천황이 같은 자리에서 칙어를 내리던 것과 같은 연속적인 행위로도 볼 수 있다. 과연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최고의 의결기관이라고 하는 국회에서 이러한 행위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행위에 각종 신성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국회의원 및 매스컴과 일본국민들의 태도는 전전에 천황을 숭배하는 태도와 연속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④ 천황이 거행하는 각종 의식: 천황은 국사행위로서 국민을 위해 의식을 거행하는데 종교색이 강한 황실의 신도의식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그 중 일부를 정부의 판단에 의해 국사행위로 인정했고, 국사행위로 인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공적 성격을 인정하여 예산을 지출한다. 이것은 황실의 사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을 지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또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의 예산으로 이러한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헌법에도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 이와 같이 관례적으로 행하는 천황의 공적인 행위는 사실상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징이라는 말로 정치성이 은폐되고 있다.
4. 상징천황제의 정착과 감춰진 정치성
①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는 당초 천황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으며, 국민주권을 전제로 한 상징천황제는 민주주의와 상충되지 않는 제도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② 상징천황제의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천황과 황실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으로 주로 매스컴을 통해 형성되었다. 민주적이고 근대적이며 인간적인 이미지, 즉 전후의 새로운 가치에 부합되는 이미지이다. 천황의 경우 전전에 군국주의체제의 통치권자라는 얼굴은 사라지고 검소하고 민주적이고 평등을 존중하는 천황이라는 것이 선전되었다.
③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천황 및 천황제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정치성을 완전히 탈피한 것처럼 보이며,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천황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친숙한 존재로 그러면서 자신들과는 다른 황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④ 상징천황제가 대중들 사이에 정착된 것을 기반으로 해서 보수정권은 착실히 천황제의 복권을 추진해왔다. 1966년 축입법 개정에 의한 건국기념일 제정, 1968년의 메이지 100년 기념식전, 1975년의 천황 재위 50년 식전, 1979년의 원호법제화, 1985년의 천황재위 60년 식전 등 일련의 조처들은 상징천황제의 역사적 의의를 형해화(形骸化)시키고 전전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작업이다.
⑤ 현재 일본의 축일(경축일)에는 천황과 관련된 휴일이 많다. 2월 11일은 건국기념일(建國記念日)로 진무천황 즉위를 기념한 날로 전전에는 기원절이라고 불렀다. 4월 29일 미도리노히(みどりの日)는 쇼와천황의 탄생일. 11월 3일은 문화의 날(文化の日)로 메이지천황의 탄생일이다. 11월 23일은 근로감사의 날(勤勞感謝の日)인데 원래는 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고 해서 천황이 그 해에 거두어들인 음식을 처음을 맛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날이다. 12월 23일은 현재 천황의 탄생일(天皇誕生日)이다.
이처럼 경축일에 있어서도 여전히 천황과 관련된 날들이 많은 것은 천황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신헌법 제정 시점을 뛰어넘어 오늘의 천황제를 과거의 절대주의적인 천황제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5. 천황의 전쟁책임과 히로히토 사망의 의의
1989년 히로히토의 사망으로 쇼와시대는 끝나고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되었다.
① 히로히토는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기까지의 매스컴의 보도상황을 통해 일본국민들의 천황에 대한 생각을 볼 수 있다. 일본의 매스컴은 히로히토가 병원에 입원해서 사망하기까지의 몇 개월간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천황의 상태를 상세히 보도하였다. 또 자숙이라는 이름하에 예정된 결혼식, 운동회, 가을 축제, 망년회 등의 중지가 잇달았다. 사망 후에는 백화점, 은행, 수퍼마켓 등이 반기를 게양하고 축하품 판매를 중지하였다. 이러한 자숙 분위기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자발적인 자숙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인 반대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따라가게 되는 분위기였다.
② 히로히토는 쇼와시대의 천황으로서 군국주의하의 전쟁을 일으킨 인물로 전범으로서 전쟁책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전후 상징천황제하에서 천황과 황실의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히로히토 천황도 절대주의적 군주, 침략자의 얼굴을 벗을 수 있었으나 그에게는 당시 통치권자로서의 전쟁책임 문제가 계속 따라 다녔다. 그의 사망은 천황의 전쟁책임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면서도, 동시에 일본으로서는 무거운 짐을 벗고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만들 기회이다. 그러나 일본국민들내에서 여전히 쇼와천황의 전쟁책임 문제는 자유롭게 토론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천황제는 여전히 전전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으며 또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끌어낼 수 있는 기반으로서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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