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1부









백년전쟁이 발발한 이유


필립프 4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는 왕위에 오르기는 올랐으나 재위기간은 다 합쳐 봐야 14년인데다가.. 세아들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이렇게 카페 왕조의 대가 끊기고 프랑스 귀족들이 지지하면 내새운 왕은 샤를의 사촌형이자 필립프 4세의 조카인 필립프 6였다. 하지만 필립프 4세의 아들들만 후사를 남기지 못했을뿐 딸인 이사벨라는 아들을 나았던 것이다. 그가 바로 당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였다. 에드워드 3세에게도 당연히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같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귀족들은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필립프 6세가 충성 거약을 강요하고 에드워드는 자존심을 굽히고 실익을 얻으려고 서약을 한다. 하지만 필립프 6세는 신분상의 우위 말고도 실익을 더 취하려 하였고 두 나라간의 충돌은 가시화가 되어 갔었는데 1330년부터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을때 필립프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였고 이에 맞써 에드워드는 양측의 쟁탈지인 플랑드로로 건너가서 프랑스의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또 에드워드는 독일,네덜란드의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공동전선을 펼쳐 노골적인 ‘반란행위를 하였다이것을 본 필립프 6세는 마지막 영국령인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몰수한다고 선언하였고 이렇게 함으로써 길고도 긴 전쟁의 서막을 연 것이다.


 

백년전쟁 1기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크레시 전투에서 장궁대를 활용하여 전력이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칼레시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시 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그 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남 프랑스를 침입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2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전쟁은 한동한 소상 상태를 보이다가 1369년에 정식으로 20년 동안 휴전에 합의했다. 이는 자국 내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럽 전역으로 퍼진 페스트 때문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밀리던 프랑스는 페스트 덕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농민을 주력으로 한 보병의 장궁대 전법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참화와 영국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하여, 1358년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는 매우 심한 궁지에 빠졌다. 그 결과 양국 사이에 브레티니 화약이 성립되어,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 등의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였다.

 

∴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장궁' 이라는 아주 강력한 화살을 지니고 있었다.

이 화살은 일반 활 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길고, 파괴력은 돌격하는 기사의 철갑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영국은 이 장궁을 이용해 백년전쟁 초기에 승리를 할 수 있었다또한, 페스트는 유럽 역사 판도를 바꾼 하나의 이유이다. 아테네의 몰락 로마의 몰락 십자군 원정 백년전쟁....


∴ 페스트는 어디서 온것일까?

동쪽에서 온것이다! 아시아를 통서 페스트 균이 전해 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십자군 모두 아시아의 군대에게서 전염되었고 14세기의 페스트는 지중해 상인들을 거쳐 이탈리아로 번졌다.


그렇다면 왜 아시아에서는 힘도 못쓰던 페스트가 이렇게 유럽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 한것일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당시의 유럽의 도시들은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였던 탓이 컷다. 한 예로 유럽에서는 사람의 인분을 아시아처럼 거름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 외곽에 쌓아 뒀다니... 할말 다한 것이다.

 

 

백년전쟁 2기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샤를 5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의 정비와 재정의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아우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패배하고, 영국 해군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전하였다. 따라서 브레티니 화약에서 영국에 할양한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1377년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도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이었으며, 특히 영국에서는 1381년 와트타일러의 난이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의 반항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13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왕이 폐위되고 랭커스터가의 헨리 4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백년전쟁 3기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즉위한 헨리 5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 아쟁쿠르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다. 헨리 5세는 이를 배경으로 1420트루아 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6세의 황태자 샤를(샤를 7)과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와 같은 영국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으므로,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바로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뒤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그 해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조약은 사실상 그 뜻을 상실하였다. 그 다음해인 1430년에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1431년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435년 동안이나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멘·보르도·칼레·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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