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2부






백년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잔다르크


가톨릭의 성녀로 추앙받고있으며 로렌과 상파뉴 사이에있는 동레미라퓌셀이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429년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루아르강변의 시농성에있는 황태자 샤를을 만문 후 영국군의 포위속에 있던 오를레앙을 해방시킨다 흰 갑주에 흰옷을 입고 항상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다고 한다.

 

1430년 5콩피에뉴 전투에서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붙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진후 1431년 마녀로 낙인찍혀 이단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한다. 그녀를 체포한 사람은 장 드 뤽상부르라는 사람이었는데일단은 그녀를 자신의 성에 가두었다그러나 정작 프랑스 왕실은 잔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교회와 영국은 서로 그녀의 이단행위(그들의 주장으로는)를 벌하려 하였다.

 

영국과 교회가 서로 잔다르크를 자신들의 포로로 만들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 피에르 코숑이라는 주교가 잔다르크를 교회재판에 넘겨 마녀임을 입증하도록 영국을 설득했다이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교회재판이 노르망디의 루앙 성에서 열리게 되었다.그녀는 성에 수감되었는데벽 두께가 12 피트였고 쇠구슬이 달린 사슬로 손발이 묶였다다섯 명의 경비병이 함께 기거하며 밤낮으로 감시하였고그녀를 희롱하거나 심지어 강간하려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재판은 이름만 종교재판이지 종교적 재판이어서 피에르 코숑 주교가 재판을 주도하였다코숑 주교는 교회지도자들의 그룹을 조직하였고60여 명이 자문관으로임명되었다


코숑과 르메르트(이단심문소 특별재판부 부심문관)이 재판관,코숑의 친구인 장 데스티베가 검찰관이 되었다검찰관은 그녀를 매춘부신성모독자라고 모욕하며고문스파이속임수 등을 사용했고 온갖 간사한 방법을 동원해(이름 뿐이지만)증거및자백을 수집했다그러나 잔다르크는 변호사도자문가도 없었고 읽을줄도쓸 줄도 몰랐다그러나 잔 다르크는 당당하고 논리에 맞는 말로 맞처 오히려 코숑 등을 당황하게 했다.

 

이 재판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1. 비공개로 열려 발언권 및 행동권이 보장되지 못했고

2. 프랑스 왕의 명예와 직결됨에도 변호의 기회가 없고

3. 혐의사실들이 피고인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4. 변호인이 없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1431년 5월 24잔다르크는 생투앙 교회묘지로 호송 되었고 그곳에서 종교재판의 판결문이 낭독되었다군중들이 빨리 화형시키라며 소리지르는 집단적 광기의험악한 분위기 가운데 통제력을 잃은 그녀는 교회와 재판관의 처분에 따르겠다는 서류에 서명하고 말았고이에 코숑은 그녀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5월 29잔느는 다시 세속법정에 회부되어 화형이 결정되었다62명의 재판관 가운데 20명은 참석하지 않았다5월 30그녀는 긴 검정옷을 입고이단타락자배교자우상숭배자라고 쓰여진 모자가 그녀의 빡빡 깍인 머리에 씌워졌다잔 다르크의 화형은 올드마켓에서 진행되어 그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잔다르크에 대한 미스테리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하고 5년이 지난 후 자신이 잔다르크라고 자처하는 여인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당시 군 생활중 이었던 그녀의 동생 프티 장과 피에르는 그녀를 만나 혼을 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잔다르크의 동생들은 기사들의 마상 시합이 벌어지는 마을로 갔다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기사의신분을 물었고 그 기사가 투구를 벗는순간 형제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잔다르크였기 때문이다 잔다르크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은 샤를7세는 그녀의 얼굴과 이야기 태도를 확인하고 그녀가 정말 잔다르크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얼마후 왕은 이러한 발표를 번복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훗날 왕이 그녀를 사기죄로 처형했다는 기록은없다어찌된 일 일이었을까

 

 

백년 전쟁의 종결

 

1445년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가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의 반항이 일어났다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옌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 ·포병(砲兵)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백년 전쟁의 의의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封建貴族)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국왕의 상비군(常備軍)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추진해 나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 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나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의 일환(一環)이기도 하였다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헨리 7세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기초을 굳혀주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독자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技術職移民)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백년전쟁의 결과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農民解放)의 진전부르주아 계급의 대두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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