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메이지 유신의 근대화 4부






초기의 입헌 정치

최초의 전국적인 선거가 189071일 실시되었고, 제국 의회는 11월 개헌하였다. 이토와 그의 동료들이 그들이 만든 체제의 작용에 대해서 심각한 계산 착오를 하였음이 곧 명백하게 되었고, 입헌 정치의 과정은 그들이 생각했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 가지 이유는 정당 정치가들이 선거 운동과 의회의 기술상에 있어서 1879년부터 존재했던 현회들에서 상당한 경험을 흭득한 것이었다


일부는 지방의 유권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정부를 당혹하게 하는 것으로 유권자들은 공공연히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보다는 정당 청치가들을 계속해서 선호하였다. 300명의 제 1대 중의원 의원들 중에서 130명은 새롭게 재구성된 자유당에, 41명은 개진당에 속하였고, 한편으로 무소속의 일부는 분명히 정부에 대항하여 야당들과 함께 투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이상의 실현

1. 안보와 제국주의

20세기의 첫 10년까지 상당히 성공적인 반의회제 정부 형태가 성취되었다. 사실상 다수의 작은 조치들과 일련의 전변하는 절충들이 대부분의 메이지 지도자들이 바랐던 것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휠씬 더 큰 출발을 만들어 냈고, 보통 교육과 급속도로 확대되는 대학 제도가 일본을 민주주의로 향하여 더 많이 이끌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메이지 번벌들의 진정한 목표가 아니었다


의회 제도들은 산업화나 보통 교육과 같이 목적에 대한 수단, 즉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의 단순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 제국으로부터 안보를 확보하는 것과 그들에 의해 일본이 동등자로 수용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비록 미래 세대들에 문제를 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이것을 완전히 성공적으로 성취하였다.

 

2. 청일전쟁

1876년의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국은 반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분쟁을 일으켰다. 북경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완강하게 주장하였는데, 일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선의 개혁가들은 후쿠자와와 같은 일본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영감을, 그리고 일본 정부로부터는 지원을 기대 하였다


1882년 여름 서울에서 수구적이고 배외적인 군중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을 때 중국과 일본은 각각 반대파들을 돕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조선의 개화파에 의한 1884년의 쿠데타가 중국 병사들과 일본의 공사관 경비대 사이의 충돌로 종말을 고하였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이토와 중국의 정치가 이홍장이 1885년 천진에서 만나서 양국이 그들의 군대를 조선으로부터 철수할 것과 다시 파견할 경우에는 상대편에 미리 통보할 것에 합의하였다.


다음 10년동안 중국인들은 그들의 군대, 특히 해군을 근대화하려는 노력을 강화하였고, 한편으로 일본인들은 점점 조선에 개입하게 되어, 휠씬 더 심각한 대결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였다. 강한 배외적 편견을 가진 대중 종교 조직인 동학이 1894년 조선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중국은 조선 왕의 요청으로 소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일본은 그 후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마침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81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어진 전투행위는 중국과 일본이 꼬박 한 세대 종안 중비하고 있던 군사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에 대한 최조의 진정한 시험이었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거인 중국이 신승할 것을 예상하였으나, 일본은 그들의 근대화가 보다 더 성공적이었음을 신속하게 증명하였다. 일본 군대가 조선 전역을 점령하였고 이어서 만주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승리는 주로 해군력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 이르는 중국의 통로조차 해군이 통제할 수 있었다. 중국의 함대가 더 컸지만, 일본의 함대는 질적으로 더 우수하였다.

 

3. 평등의 달성

중국에 대한 일본의 승리는 서구를 트게 감명시켰고, 특히 중국의 무능에 실망한 영국은 결정적으로 보다 친일적인 태도를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맺은말

선진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기 전야인 19세기 중반의 시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과정으로 그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1854년 미·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7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 ·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전쟁의 도발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다음 단계가 무력으로 한국을 병합한 것이다.


이러한 군국주의의 종말은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유발하였고,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상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비극을 자초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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