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메이지 유신의 근대화 3부






헌법의 제정

1. 대의 기구에 관한 초기의 관심

메이지 지도자들은 그들이 수행한 초기의 정치 개혁들이 주로 임시 변통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사쓰마 반란을 진압한 후 전국에 걸쳐 도전을 받지 않는 지배권을 확립하자, 그들은 좀더 영속적인 정부 형태를 고안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다. 2세기 이상 분명하게 규정되고, 완전하게 수용되었고, 거의 변하지 않는 정치 질서를 향유했던 사회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과 같이 분명하고, 변하지 않고, 도전을 받지 않는 정통성이 있는 정치 체제를 갈망하였다. 서양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대의 기구들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의 정치 기구의 창출을 기꺼이 고려하려는 그들의 의지는 일본의 전통으로부터 놀라운 이탈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서구 제도들의 명백한 위광과 가장 선진적이고 강력한 나라들이 대의정치를 구현한 헌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보와 힘을 만들어 내는 무엇이 헌법과 대의 기구에 있으리라고 확신한 가정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후진성의 원인이 지나치게 전제적이었던 정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헌법과 의회가 일본에 대한 서구의 존경을 크게 증진시키고 일본이 동등자로서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날을 더 가깝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국면의 또 다른 요인은 정부 지도자들이 단지 억압된 농민들과 정치적으로 무감각한 조닌들만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계급전체는 잘 교육을 받았고 자신들이 정치의 정당한 참여자들임을 느끼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정부에서의 몫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5개조의 서문에서 널리 회의를 일으켜 모든 일을 공론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한 약속이 아마도 그들에게는 그들이 새로운 정치 질서에서 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보장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회의와 공론은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그렇게 익숙하지 못한 기술이었다. 1868년과 1870년 사이에 부분적으로 한의 대표들로 구성된 심의 회의를 만들려는 네 번의 시도들이 가치있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졌고, 이 시도가 조용히 중단되었을 때 별다른 큰 반대가 없었다.


대의 기구들에 대한 관심은 1873년 가을, 도사의 이타가키가 정치 클럽을 창설하자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는 정한론에 대한 이견 때문에 정부를 떠난 후에 히젠의 에토와 다른 도사 지도자들과 더불어, 정치 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를 나중에 아이코쿠(愛國社)라고 이름붙였다. 도라는 말이 중국 역사의 관려적 당파주의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과감한 조치였다. 그러나 새 집단은 정부의 자의성을 비난하고 민선 의원의 설치를 서슴없이 요구하였다. 이타카키는 다음해 사가에서의 에토의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절하였으나, 대신에 스마일스의 널리 읽혀진 책인의 일본어 제목에 근거한 이름인 릿시샤(立志社)로 불려진 새로운 정치 조직을 설립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36


새 정치 지도자들 중 왜 이타가키가 민주주의로 유별난 선회를 하게 되었는가, 혹은 그의 고향 도사에서 왜 그의 사상들에 대한 그렇게 즉각적인 호응이 있었는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도사는 상대적으로 후진적 변경 지역이었고, 이타가키는 특히 군인 정신이 넘치는 사무라이였다. 하나의 요인은 새 정부에서의 사쓰마와 조슈의 지배적인 역할에 대한 도사 사람들의 원망이었을 것이다. 보다 기본적인 이유는 도사의 고시 계급이 사무라이 지위를 살수 있도록 허용되었던 쇼야들이나 상인들과 함께 오랫동안 한의 도시 행정에 대해 반대해 왔고 그들은 대중적 반대의 태도들이 용이하게 새정부로 옮겨진 것에 있다.


정부 지도자들은 이타가키의 요구에 특별히 충격을 받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그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사실 그들 자신이 헌법을 위한 여러 제안을 연구하였고, 1875년 천황으로 하여금 머지않아 국회가 개설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게 하였다. 기도도 또한 그 전해에 화가 나서 사임하였는데. 그 후 정부에 다시 참여하도록 그를 권유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 바 있었고, 그 합의에 기초하여 1875년 이타가키도 마탄가지로 정부에 복귀하도록 설득되었다. 오사카의 합의는 재편을 필요로 하였다.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심원이 설치되었고 원로원이 구성되어 국회를 준비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원로원이 1880년 마침내 헌법의 초안을 제시하였으나, 그 당시 정권의 최고 실력자들었던 이와투와와 이토는 이 초안이 영국 제도들을 지나치게 본떳다고 하여 묵살해 버렸다.

  

2. 자유 민권 운동

이타가키는 표면적으로 오사카 협정의 한 항목이 실해되지 않은 것을 이유로 1875년말 다시 정부로부터 사임하였고, 1878년 전국적 대중운동을 창출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재개하였다. 이번에는 그들의 의회제 형태의 정부 요구에 대한 엄청난 호응이 있었다. 소위 이 지유 민켄 운도가 인기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사무라이들의 현재 상황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러나 수가 가장 많았고 또 가장 열렬했던 운동의 참가자들은 부유한 농민 지주들인 고노와 소기업가들이었는데, 그것은 곤궁한 사무라이들보다는 그들이 주요한 조세 부담 집단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사무라이 출신들이 보통 최상위의 지도자들과 지적 지도자가 되었으나 농민과 기업가는 주된 재정덕 원조와 새로운 정치 결사의 구성원의 대부분이 되었다


국회 개설 운동 확산의 또 다른 이유는 주로 후쿠자와의 책들과 다른 저술가들의 책들로 인해 일본 지식인드르이 민주주의적 기구들에 관한 지식이 증대하였기 때문이다민주주의 전총과 표현의 자유가 일본에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 정치적 선동과 반란을 통한 반대 사이의 구분이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앞서의 10년동안 시시들의 주된 무기였던 정치적 암살조차 장래의 자유민권운동 옹호자들의 일부에게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정부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쿠보가 사쓰마 반란에서 죽음에 대한 복수와 인민의 권리를 수호한다는 기묘하게 혼합된 동기들을 가진 과격파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3. 메이지 헌법

헌법을 기초하는 실제적인 작업과 그것은 보조적인 입법은 1886년까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토 지휘하의 주요 참여자들 가운데 독일인 뢰슬러가 있었다. 완성된 문서는 1889211일 공포 되었는데 이날은 기원전 660년의 일본 국가의 가정된 개국 공식 기념일이다. 헌법은 또한 종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당한 법의 절차에 대한 권리들과 같은 전반적인 일련의 기본권을 비록 이것들이 모두 만일 법에 규정된 경우가 아닌면 이거나 안녕과 질서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와 갗은 구절들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었지만, 보장하였다.


이것은 대담한 혁신이었으나, 지도자들은 그들이 천황의 대권과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적절하게 보장하였다고 믿었다. 헌법은 천황의 하사품으로서 주어졌는데. 천황은 수정을 발의할 독점적인 권리를 예비하고 있었으나 어떤 수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헌법은 천황이 신성 불가침하고 만세일계로 군림한 왕조의 후손으로서 주권의 소재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천황이 모든 행정권과 아울러 제국 의회의 동의하에 입법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개개의 대신들이 내각으로서 집단적인 책임을 지기보다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는데, 내각은 헌법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하였다. 황실의 예산은 의회의 통제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있었다. 천황은 언제든지 의회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거나 새로운 선거를 필요로 할 중의원의 해산을 감행할 수가 있었다. 의회가 휴회중일 때는 그는 법을 대신하는 칙령을 발할 수가 있었다. 의회가 휴회중일때 그는 법을 대신하는 칙령을 발할 수가 있었다. 번벌들은 또한 돈주머니 줄에 대한 의회의 지나친 통제를 방지하기위하여 그들이 비상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을 보유하였는데, 만일 의회가 새 예산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전년도의 예산이 그대로 효력을 지니도록 하였다.


 

보다 타당한 비판은 헌법 체제의 애매성에 향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광범위한 천황권에 대한 가장은 사실상 천황이 본질적으로 상징으로 남아 있는 한 번벌들이 그의 이름으로 행동함에 있어 어떤 심각한 어려움도 초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번벌 집단은 헌법의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고 어떤 후계 기구를 위해 마련된 규정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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