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무신란(武臣亂)와 무신정권(武臣政權) 2부






귀족사회(貴族社會)의 동요와 무신란(武臣亂) - 2


2. 귀족사회의 붕괴

귀족사회의 전성기인 문종 이후 의종대에 이르는 귀족정치의 전개는 점차 귀족사회 내부에 모순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문벌귀족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관직에 따른 전시과나 공음전 외에도 賜田(사전)을 받고특히 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토지의 탈점을 통하여 막대한 사전을 겸병하였다이러한 정치권력과 경제력의 특권적 확대는 이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나타난 지배세력의 내부분열은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지방출신의 신진관료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그 구체적인 사건이 인종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이자겸은 고려 전기의 최고의 귀족문벌인 인주 이씨로서 예종의 外舅(외구)가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그는 인종이 즉위하자 예종의 동생인 帶方公 俌(대방공 보)를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제거하고이와 함께 韓安仁(한안인․ 文公美(문공미․ 李永(이영등을 이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이것은 이자겸 일파가 그들에게 도전하여 오는 지방출신의 신진관료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책동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에 대한 반대세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이자겸은 권세를 탐하여 인종에게도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마침내는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이에 1126년 국왕의 측근세력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거사하였으니이들은 문벌귀족에 반대하여 왕권을 옹호하려는 세력으로서 신진관료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이 거사는 이자겸의 일당인 俊京(척준경)의 군사행동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그 후 이자겸은 인종을 살해하려는 등 횡포를 다하였으나척준경과 반목하게 됨으로써 도리어 척준경에 의해서 축출되고 말았다이자겸이 제거됨으로써 인주 이씨는 몰락하였으니이는 고려 전기의 귀족사회가 붕괴되는 발단이 되었다.


이자겸에 이어 또 묘청이 난을 일으켰는데이것도 개경의 문벌귀족에 대립한 지방신진세력의 반항운동이었다이자겸의 난 때 궁궐이 불타버려 개경은 황폐해지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이 때 고려는 밖으로 금에 대한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되어 백성들은 허탈에 젖게 되었다서경세력들은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에 천도하면 천하를 가히 아우를 수 있고금도 스스로 와서 항복하며 해외의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하였다이리하여 이들은 서경의 명당이라는 곳에 대화궁을 짓고 칭제 건원을 내세우며 금국정벌까지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려사회를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사대적인 개경의 문벌귀족정치를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실행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묘청의 서경천도론은 오랫동안의 문벌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부흥시키려는 인종에게는 받아들여졌지만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 문벌귀족들이 이를 미신행위로 공박하고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묘청등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大爲(대위)연호를 天開(천개)라 하고 스스로를 天遣忠義軍(천견충의군)이라 칭하였으니여기에도 그들의 자주적인 의식이 나타나 있었다그러나 이 거사는 결국 문벌귀족의 대표인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토벌로 1년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귀족사회의 모순은 지배세력의 내부적 분열을 일으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표면화되었다이 양란은 일단 수습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귀족사회의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이리하여 고려귀족사회는 그 근저로부터 동요하고 점차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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