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무신란(武臣亂)와 무신정권(武臣政權) 3부






무신란(武臣亂)


1. 무신란의 발생

고려 귀족사회는 결국 1170(의종 24)에 일어난 무신란에 의해서 붕괴되었다귀족사회의 내부적 모순으로 폭발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정치 몰락의 단적인 표현이었는데이제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귀족사회의 결정적 파국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무신란 발생의 요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고려의 귀족정치가 성숙함에 따라 문벌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확대하여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였는데이를 놓고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자기항쟁이 전개되었으며특히 기성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의 도전이 치열하였다


이러한 지배세력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귀족사회는 동요되었으니이것이 무신란 발생의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무신란 발생의 직접적인 동기는 귀족정권의 대무신정책의 모순에 있었다고려는 양반제도를 만들어 문반과 무반을 하나의 관계체계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하고 법제적으로는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였으나실제에 있어서 崇文 賤武(승문 천무)의 정책에 따라 문반에 비해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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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은 문반직을 가지고 정치권력을 차지하였고 심지어는 군대를 지휘 ․ 통솔하는 병마권까지도 장악하여 무반은 다만 문신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대우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은 서서히 그의 지위를 상승시켜나갔다양반이라 하는 법제적 지위를 근거로 하고 거란 ․ 여진과의 전쟁을 통해 현실적인 세력을 축적하여 나갔던 것이다


1076(문종 30)에 갱정된 전시과에서 무반에 대한 대우가 좋아진 것이나, 1109(예종 4)에 무학재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귀족정권의 천무정책에도 불구하고 무반의 현실적인 지위의 상승이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또한 문신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려의 군인들은 일반 농민층으로 충당되는 것이 보통이었다그런데 문신귀족들이 농민의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농민의 생활은 곤궁하게 되었고또한 이들 군인들은 여러 가지 잡역에 혹사당하였으며자기들에게 지급된 군인전마저 귀족들에게 빼앗겨 불만이 커졌던 것이다이러한 군인들의 처지가 자기들의 직접상관인 무신들의 불평과 결합되어 귀족정권 타도에 동원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마침내 1170(의종 24)의 무신란으로 폭발되었다태평호문의 군주라 일컬어지던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보현원에 놀러갔을 때 호위한 무신 정중부 ․ 이의방 ․ 이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한 후 왕제인 명종을 옹립하였다이리하여 무신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잡아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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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출현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문신귀족정치의 누적된 모순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귀족사회는 붕괴되고 새로이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으니무신란은 고려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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