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무신란(武臣亂)와 무신정권(武臣政權) 4부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성립


1.무신정권의 전개

1170(의종 24)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란에 의하여 수립된 무신정권은 1270(원종 11) 林衍(임연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꼭 100년간 계속되었다이 동안 무신들은 초월적인 권력을 가진 武人執政(무인집정)을 정점으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그러나 무신정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였으므로 이를 형성기와 확립기그리고 붕괴기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무신정권의 형성기는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1196(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할 때까지를 말한다이 때는 아직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하여 무인집정의 지위가 불안정하였고무신정치는 무신세력의 집합제인 重房(중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따라서 종래의 문신세력의 반항이 일어났고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교종계통 승려들의 반란이 발생하였으며무신 상호 간에도 치열한 정권다툼이 전개되었다.



1173(명종 4)에는 동북면방마사 금보당이 의종 복위를 꾀하여 거병하였다가 실패하였는데이것은 무신정권에 대한 문신세력의 반항이었다이듬해에도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북면지방민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부르짖고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되었다또한 이듬해에는 귀법사 등의 승도 2,00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이것은 왕실 ․ 귀족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교종계통의 사원세력이 무신정권에 반발한 것이었다명종 초에는 불안정한 무신정권을 전복하려는 이러한 반무신란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이 때에는 무신정권의 대표자인 무인집정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쉴 새없이 정권이 교체되었다처음 무신란을 일으켜 함께 정권을 잡았던 정중부 ․ 이의방 ․ 이고 사이에 분열이 생겨 1171(명종 1)에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하더니, 1174(4)에는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하였다그러나 정중부도 1179(명종 9)에 장군 경대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1183(13경대승이 병사하자 이번에는 이의민이 집권하였지만 그도 1196(명종 26)최충헌에게 숙청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명종조에는 아직도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하고 정권을 잡은 무인집정이 잇달아 바뀌었는데이러한 혼란은 결국 최충헌이 집권함으로써 수습되었다최충헌은 과단성있는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다짐으로써 최우()()()에 이르는 4대 62년 간 최씨정권이 계속되었으니이 기간을 무신정권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敎定都監(교정도감)이라는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만들고 막대한 사병을 조직하여 자신의 무력기반으로 삼는 등 자체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하여 전형적인 무신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이것은 형성기의 무인집정이 공식적인 정부관직의 권위를 필요로 하고 중방을 통하여 무인정치를 시행하였으며아직도 왕조의 부병이나 조직화되지 못한 문객가동의 사적 무력에 의지하였던 것에 비하여 커다란 변화였다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을 세우는 등 마음대로 국왕을 폐립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최씨정권기에는 전과 달리 일반무신들의 옹호가 필요없게 되어 오히려 무신과 중방을 억압하고 문신을 보호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최충헌은 그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무신은 가차없이 제거하였고중방무신들의 권위를 무시하였다반면 최충헌은 무신정권에 위험이 없는 무력한 문인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행정적인 능력을 이용하였으니이규보가 발탁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최충헌은 또한 무단정치로 당시 빈발하였던 민란을 진압하는 동시에 사원세력의 반항을 억압하였다무신정권에 대한 승도의 반란을 무신란 직후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최충헌 집권 후에 특히 심해졌는데이들은 국초 이래 왕실의 비호를 받고 문신귀족들과 연경되었던 귀법사 등 교종 계통의 사원세력으로 무신정권에 대립하는 복고적인 항쟁을 일으켰다이에 최씨정권은 무력에 의한 탄압으로 이들 사원세력을 억압하는 동시에 교종을 대신하여 선종사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258(고종 45) 최의가 김준 ․ 임연 등에 의하여 제거됨으로써 4대에 걸친 최씨정권도 무너지고이제 무신정권은 붕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처음 김준이 무인집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나 1268(원종 9) 임연에게 빼앗기고이것이 다시 그의 아들 임유무에게 전하였는데이러는 사이에 무신정권도 점차 약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김준과 임연 ․ 임유무 부자도 무인집정의 지위를 표시하는 교정별감이 되어 무인정치를 계속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집정기구와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집단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기반이 약화되어 무인집정의 지위도 불안정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준 ․ 임연정권은 자체 기반이 약화되어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이를 붕괴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밖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당시 몽고의 간섭이 무신정권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몽고는 항몽의 주동자인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고고려국왕도 무인정치로 약화된 왕권의 회복을 꾀하며 몽고와 결합하였다. 1270(원종 11) 몽고세력의 옹호를 받은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였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전문규 ․ 송송례 등이 임유무일당을 주륙하였으니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100년 간 계속된 무신정권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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