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무신란(武臣亂)와 무신정권(武臣政權) 6부






무신정권 대표 인물


1. 정중부

본관 해주(海州).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고의종 초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1164(의종 18)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1170년 왕의 보현원(普縣院거둥 때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뢰(韓賴)에게 구타당하자 격분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벌거벗은 한국사 E06


이어 의종을 폐하고 왕제 익양공(翼陽公(:明宗)를 즉위시키는 한편의종과 태자를 유배시켰다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와 함께 전왕의 사제(私第)를 분점(分占), 스스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으며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문하평장사·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 등을 지냈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간의대부(諫議大夫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의 집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문하시중이 되고 117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뒤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慶大升)에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2. 경대승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의 아들로 15세에 음서로 교위(校尉)가 되고뒤에 장군에 이르렀다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헌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경대승은 무인(武人)의 불법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무신의 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宋有仁)이 문극겸(文克謙)과 한문준(韓文俊)을 탄핵하자 이를 계기로 무인 집권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1179(명종 9)에 허승(許升등과 함께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아들송유인(宋有仁등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그후 허승·김광립(金光立등이 자기의 공()을 믿고 많은 폐단을 끼치자다시 이들을 잡아죽였다.


좋은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학식이 없는 자들을 거부하여 무신의 난에 참여했던 무인들의 반감을 샀다신변보호를 위해 도방(都房)을 설치하였고이의민을 제거하려고 하였다정보원을 풀어 유언비어를 단속하고 가혹한 형벌을 사용하는 등 잔인한 정치를 펼치다 30세에 병사하였다.


3. 이의민

본관 경주(慶州). 아버지는 소금장수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천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안찰사(按察使김자양(金子陽)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수박(手搏)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1173(명종 3) 김보당(金甫當장순석(張純錫등의 의종 복위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이듬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자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 경주에 은거해 있었다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난을 일으킬까 도읍으로 불러들였다공부상서(工部尙書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거쳐,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에 이르렀다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역모(逆謀)할 뜻으로 명사들을 포섭하고 적도(賊徒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등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며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였다아들들도 아버지의 권세에 의지하여 탐학을 자행했다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것이 계기가 되어 미타산(彌陀山별장에서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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